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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선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의 미학

by Ubermensch





인간관계에는 보이지 않는 선이 있다. 타인의 접근이 허용 가능한 범위는 사람마다 다르다. 그 선이 중심부와 가깝고 흐려 개방적인 선을 가진 사람도 있고, 중심으로부터 거리가 멀고 마치 성곽처럼 단단하고 높은 선을 가진 사람도 있다. 관계 유지를 위해 이 정해진 선을 지키는 일은 몹시 중요하다. 선을 잘못 넘으면 자칫 상대방의 세계에서 퇴출당할 위험도 있기 때문이다.


꼭 무례하고 경우 없는 사람만이 선을 넘는 것은 아니다. 친밀감, 애정, 관심, 끌림, 욕구 등의 여러 가지 감정을 토대로 누군가는 타인이 그어놓은 선 안으로 한 발짝 더 내디뎌보고자 하는 충동을 느낀다. 나도 선의 경계에서 줄 타는 일을 즐긴다. 주로 내 윗사람에게 그렇다. 보통은 내게 주어진 허용 범위가 넓었기 때문에 오냐오냐 자란 아이처럼 버릇이 잘못 든 면도 없지 않다는 사실에 대해 인정하고 있다.


반면 사적인 관계에서는 내 선도 타인의 선도 멀찍이 두는 것을 선호한다. 타인의 고통을 인지하고 느끼면서도 섣불리 먼저 아는 체 하거나 이해한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먼저 열어주면 나도 느끼고 공명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만 알려 줄 따름이다. 더불어 타인이 내가 그어둔 선에 함부로 침입하려는 시도도 반기지 않는다. 그런 면에 있어 나는 잔혹한 편이다. 내게 깊이 관여하고, 어떤 통제를 시도하거나, 나를 고치려 하거나, 불필요하게 가까워지려는 시도를 극도로 경계한다. 타인에 의해 내 세계가 흔들리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몇 차례 경고를 한 이후 반복되면 퇴출한다.


사람을 자산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두루두루 원만히 최대한 많은 사람들과 깊은 교류를 하고 지내는 것이 삶을 풍요롭게 사는 방법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일정 부분 동의한다. 하지만 나는 소수라 할지라도 서로의 선을 지켜주고 유지할 수 있는,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그런 관계를 선호한다. 비정하거나 모질어 보일지 몰라도 그게 서로가 다치지 않도록 안전을 지켜주는 방식이라고 믿는다.


감정이든 무엇이든 일방적으로 퍼붓는 관계는 건강하지 못하다. 얼어붙거나 타버리지 않도록,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에서, 서로를 있는 그대로 존중해 주고 지켜주는, 그리고 알아봐 주는. 딱 그 정도의 선이 필요하다. 우리는 종종 선을 지키는 일에 실패할 때가 있다. 사람이기에 할 수 있는 인간적인 실수다. 하지만 성인이므로 인정하고 책임질 줄 아는 성숙함 또한 필요할 것이다.


어제와 오늘은 방 식구들과 점심을 먹었다. 부장님이 나를 원 소속 부서로 빼앗길지도 모르니 최대한 밥을 많이 먹어야 한다고 했다. 부장님이 주문한 탄탄멘 국물을 한술 떠드시곤 감탄하시기에, 곱창국수를 시켰던 나는 부장님 그릇의 국물을 떠먹었다. 부장님은 아무렇지도 않게 국물 말고 면도 먹으라고 하셨다. 카페에서는 앞자리 계장님이 강아지 산책용으로 좋겠다는 한파 대비 방한바지 링크를 보여주며 혹시 중국 쇼핑몰 계정이 있는 사람이 있는지 물었다. 직접 가입하기에는 신용카드 정보가 중국으로 유출될까 봐 걱정이 된다고. 나도 걱정이 되지만 그 중국 쇼핑몰엔 내가 좋아하는 예쁜 쓰레기를 많이 팔기 때문에 마침 아이디가 있었다. 마침 광군제 할인 행사를 해서 가격도 저렴하기에 내가 사드리겠다고 했다.


사는 김에 부장님께도 따뜻한 방한 바지를 사드리고 싶어졌다. 부장님은 평소 몇백 원 더 저렴한 식자재 장보기를 위해 이 마트 저 마트를 전전하며 하루 만 오천보 이상을 떠돌아다닌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늘은 부장님네 집주인이 이사를 나가라고 했다며 이 추위에 거리에 내몰릴 주거불안에 떨고 있다고 하셨다. 내가 부장님께 방한바지를 사드린다고 하자, 부장님께서는 아이 어떻게 그러냐고 하시며 사이즈를 알려주셨다. 나는 나보다 10년 선배 계장님과 작은아버지뻘 부장검사님의 방한 바지를 사드리는 기특한 막내 계장이다.


우리 사무실 공동체는 직급과 나이와 선후배와 직렬 간 선이 명확하지 않다. 먹던 수저로 국물도 디저트도 나눠 먹는다. 서로서로 배려하고, 타박하고, 놀리고, 사회적 지위를 따지지 않고 마치 한 가족처럼 지낸다. 회사에서 만난 사람들이지만 어느새 밥을 함께 먹는 식구(食口)가 되어버린 것이다. 상호 신뢰가 쌓이며 자연스럽게 서로의 곁을 내어주고 각자의 허용 범위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관계의 선은 함께 나눈 마음의 깊이에 비례해 흐려지고 가까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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