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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번호

by Ubermensch








없는 번호에 전화를 걸어봤다. 나는 내 것을 제외하면 외우고 있는 남의 번호는 두개밖에 없다. 하나는 1년에 한 번 걸까 말까 한 엄마 번호, 하나는 근 십 년간 만나며 98번쯤은 이별과 재결합을 반복해 오는 과정에서 4,5년간은 차단 상태로 두었던 전 남자친구 고소한 정수리의 것이다. 주말의 긴 겨울잠에 들어 해가 지고 나서야 눈을 뜬 내게 갑자기 떠오른 번호가 있었다. 한번 걸어보았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하는 상냥한 기계 여자의 음성만 들려왔다. 없는 번호일 수밖에 없다. 애초에 0394라는 지역번호는 십 년도 더 전에 다른 번호로 교체되었다. 내가 전화를 건 그곳에는 지금 아무도 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한 번 걸어봤다.


그곳엔 계절마다 무수한 종류의 꽃들이 피고 졌다. 땅에 붙어있는 꽃, 어린 내 키만 하던 꽃, 내 두 팔로 감싸 안기엔 역부족이던 커다란 나무도 많았다. 과일도, 곡식도, 흙도, 초록도 가득했다. 벌레와 곤충도 많았다. 나는 지금도 벌레를 무서워하지 않는다. 송아지도 소도 염소도 강아지도 고양이도 있었다. 어떤 꽃을 따서 끝부분을 입에 넣으면 달콤한 꿀이 나왔다. 여름밤에는 봉숭아 꽃을 짓이겨 손톱을 붉게 물들였다. 첫눈 올 때까지 손톱에 꽃물이 남아 있으면 소원인가 첫사랑인가가 이루어진다는 거짓말이 거짓말인지 몰랐을 때였다. 내 피부는 까매졌다. 뜨거운 태양 아래 바다로 계곡으로 들로 논으로 밭으로 온종일 뛰어다녔기 때문에.


그곳에는 그리운 사람들이 있었다. 늘 헤어져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곳을 떠날 나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더운데도 뜨거운 곳에서 자야 했다. 뜨거운 것 때문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발끝으로 걸었다.


몇 년 전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그곳에는 아무도 살지 않게 되었다. 작은아빠가 영정 사진을 들고서, 사시던 집 보고 가이소. 하며 한 바퀴 돌았을 때. 그 옆자리가 마지막이었다. 그곳엔 더 이상 꽃도 나무도 없었다. 다 스러져가는 낡은 구조물만 흉측하게 남았을 뿐이었다. 그래서 더 이상 가볼 수가 없다. 그래서 수년이 흐른 오늘 전화만 걸어봤다. 할머니가 하염없이 기다리던 목소리로 내 이름을 크게 부르는 게 들리는 것 같아서. 이미 진작에 없어진 번호로 전화를 걸어봤다. 할머니는 내가 멀리 사니까, 할머니가 간절히 바라고 멀리 사는 나도 간절히 바라면 우리가 한 번씩 볼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전까지 벽에 잔뜩 붙어있던 내 사진을 보겠다고 했다. 간절히 바라기만 하지 말고 내가 더 자주 갔으면 됐을 텐데. 이제는 전화를 걸어도 가는 것도 간절히 바라는 것도 다 소용이 없다. 지금 이 추운 겨울에 돈을 벌어서 따뜻한 외투를 사도 입어줄 사람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