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성냥

흰 바람벽이 있어

by Ubermensch







세월히 많이 흘러 흐릿해진 영수증 수천 장 뭉텅이가 들어있는 박스가 내 캐비닛에 있다. 그중 증거로 쓸 만한 것들을 찾아야 한다. 우리 부장님은 나만 믿겠다고 하셨다. 동료가 한두 명만 더 있어도 사무실 바닥에 돗자리를 펴놓고 박스 내용물을 와르르 뿌려놓고 보물찾기 하듯 재밌게 했으면 좋겠지만 혼자 하려니 왠지 선뜻 시작이 마음먹어지지 않는다. 차라리 흉악한 피의자를 불러 조사를 하고 싶다. 이번 주말에 꼭 시작할 작정으로 금요일 퇴근 전 주말 종일 사전 초과근무를 올려놓고 왔다.


그런데 이번 주말은 유독 춥다고 해서, 토요일 오전에 발레학원만 다녀오고 내내 집에 있었다. 준비를 해서 회사까지 가기가 싫어졌다. 거의 잠을 잤다. 너무 오래 누워있느라 허리가 아팠다. 렌즈도 안 빼고 자서 눈도 뻑뻑하고 시야도 흐렸다. 옆으로 누워 인형을 껴안고 흰 벽을 바라보며 생각을 했다. 백석의 시도 문득 떠올랐다. 흰 바람벽이 있어.


흰 바람벽이 있어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ㅡ


생각은 주로 과거의 축으로 향한다. 자꾸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다. 그건 성냥불을 켜는 행위와 다름없다.


딱히 남는 것도 없고 겨울의 추위를 버텨내는 데에는 아무 의미도 없다. 장면이 오래 지속되지도 않는다. 그저 까맣게 연소된 성냥개비만 주변에 툭툭 떨어질 뿐이다. 자꾸 성냥을 켜다 보면 검댕도 묻어난다. 잘못하면 손을 데기도 한다. 나는 손을 흰 이불에 문질러 닦는다. 과거를 자꾸 돌이키면 현재를 돌보지 못하고 미래를 향하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과거에 한쪽, 현재에 한쪽 발을 담근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로 머무르고 있다. 바보 같고 답답한 상태다. 알고 있다. 하지만 자꾸 찰나의 과거를 재생하게 된다. 이유는 알 수 없다. 보통 사람들은 안 그런다고 한다. 그러지 말라고 한다.


현재에 웃을 일이 딱히 없어서 그렇다. 겨울은 그렇다. 해가 짧고 밤이 길다. 시야에 보기 좋은 것, 예쁜 것들이 잘 담기지 않는다.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모로 누워 흰 벽을 스크린처럼 바라보며 과거의 한 때를 재생하고, 겨울밤 긴 꿈속을 떠돌고, 현재의 보기 싫은 것들과 미래의 막막한 두려움을 애써 모른 척하며 살고 있다. 스스로가 나약하고 보잘것없게 느껴진다. 춥고 어둡고 움츠러든 겨울이 지겹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