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 시나리오
금요일 퇴근길 아파트 단지에 들어와서 내 차를 바짝 추격하는 차를 피하다가 주차된 차를 긁었다. 소리가 요란하게 나서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나는 바로 내려서 피해 차량의 상태를 확인했다. 피해 차량 범퍼에 뽀동이의 크리미 화이트 자국이 잔뜩 묻어나 있었다. 뽀동이는 이미 만신창이고 나는 충분히 가난하므로 뽀동이의 상처들은 고치지 못하고 누더기인 채로 다닌다.
피해 차주에게 연락하기 위해 앞유리 양쪽을 살펴보았지만 연락처가 보이지 않았다. 장애인 차량이라는 표지만 있었다. 나는 피해차량 범퍼에 묻은 뽀동이의 흔적을 촬영하고 내 차로 돌아가 명함에 내 범죄사실과 사과를 적어서, 피해 차량 운전석 창문에 단단히 끼워두고 올라갔다. 이건 얼마짜리 사고일지 울적해졌다.
주말 내내 연락은 오지 않았다. 우리 동 앞에 주차되어 있었는데 아침에 내려가보니 피해차량은 떠나고 없었다. 주말 내내 기다렸지만 연락이 오지 않았다. 오늘 출근을 하는데, 저쪽에 주차된 피해 차량을 발견했다. 세차한 지 1년이 넘어 뿌연 내 뽀동이 창문 시야에서도 피해 차량 범퍼에 문대진 뽀동이의 크리미 화이트 자국이 보였다.
오늘 한 시간 반 정도 걸리는 출근길동안 내내 피해 차주로부터 지금까지 연락이 없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예상 시나리오는 아래와 같다.
1. 피해차주는 시각 장애인이다. 그래서 내 명함을 못 봤다.
출근해서 앞자리 계장님께 말했다가 바로 기각당했다. 시각장애인이면 운전을 하겠냐고. 나는 그래서 주장을 조금 구체화했다. 차에 펜이 자주색밖에 없어서, 자주색으로 메모를 남겼는데, 피해 차주는 적색 글씨를 못 읽는 장애가 있다는 추측이다. 앞자리 계장님은 또 코웃음을 쳤다. 나는 허리를 굽히지 못하는 세 번째 장애설을 내세웠다. 그래서 범퍼 쪽을 보지 못해 그냥 넘어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 가설은 무시당했다.
2. 내가 끼워둔 명함이 바람에 날아갔다.
그러기엔 내가 사이드 미러가 접힌 쪽에 단단히 끼워두긴 했지만 이 부분은 확실히 모르겠다. 만약 바람에 날아간 것이라면 나의 잘못이 있는가? 한번 더 명함을 끼워야 할지 고민이다.
3. 피해 차주가 용서했다.
우리 아파트 주민들은 너그러운 사람들이 많다. 엘리베이터에서 안부를 묻기도 하고, 전에 경기도에서 창원까지 당일치기 출장을 다녀와 너무 지친 나머지 무리하게 좁은 공간에 주차를 하다가 새 차를 대차게 긁었는데, 차주가 어차피 범펀데요 뭐 괜찮습니다 하며 나를 용서해 준 것도 모자라, 굉장히 협소한 주차공간에 대리 주차까지 해 주었던 일이 있다. 그날 나는 하늘하늘한 흰 블라우스에 하늘색 스커트를 입은 예쁜 차림이었고 비를 맞아서 애처로워 보이고 옷이 젖은 채 허리를 꾸벅꾸벅 숙이며 사과를 했었다. 차주는 젊은 남자였다. 상황상 용서받을 수 있을 개연성이 있는데, 이 피해 차주는 나를 본 적도 없고 실제 사과를 받은 적도 없으므로 용서받았다기엔 애매하다.
4. 피해 차주는 수배자다.
내 명함에는 무슨지방검찰청 검찰수사관이라고 적혀있다. 피해 차주가 만일 수배자라면, 나한테 연락해서 수리비 몇십만 원을 받는 것보다 지금껏 숨기고 있던 엄청난 범죄사실이 드러나 검거될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 더 큰 문제일 것이다. 그래서 내 명함을 보고 화들짝 놀라 차라리 범퍼를 내버려두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 하에 내 명함을 찢어버리고 도망친 것이다. 실제로 오늘 보니 그 차가 평소 대던 장소보다 더 먼 곳에 주차를 해 둔 것을 발견했다.
5. 피해 차주가 나를 사기꾼으로 생각했다.
요즘 많은 보이스피싱범 등 사기꾼들이 검찰청 수사관을 사칭한다. 실제 나에게도 본인이 검찰수사관인데 내 계좌가 범죄에 연루되었다며 보이스피싱 전화가 온 적이 있다. 피해 차주는 검찰청 명함을 보고 내가 사기를 치려고 교통사고를 가장해 본인에게 접근한 것이고 재수 없다고 생각하며 내 명함을 찢어버리고 무시해 버린 것이다.
6. (아기 실무관님의 생각) 주말이었으므로 평일에 수리하고 연락할 예정이다.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것 같다. 그래도 주말 중에 차를 이동했고 내가 끼워놓은 명함과 메모를 봤다면 내게 연락해서 보험 접수를 해달라든가, 평일에 수리하고 연락드리겠다는 메세지 정도를 보내주면 내가 시나리오 5개를 생성해내지 않았을 텐데.
이 사건이 어떻게 종결될 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앞자리 계장님은 내가 사고를 참 많이 내는 것 같은데 차를 팔아버리면 안되냐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