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피사고 2

히유..

by Ubermensch






불과 며칠 전 단지 내 주차장에서 선량한 장애인 차량에 뽀동이의 크리미 화이트 자국을 잔뜩 문대고 연락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다. 어제 하루 종일 눈이 빠지게 영수증에서 증거 보물 찾기 노가다를 하다가 18시 종이 땡 치자마자 발레학원에 가려고 호다닥 뛰어내려가 차에 탔다. 주차장 출구 정방향으로 가기엔 더 먼 길을 가야 해서 각이 잘 안 나오는 역방향으로 휘돌다가 또 다른 선량한 차를 긁고 말았다. 이번엔 검은 차에 뽀동이의 크리미 화이트 자국을 잔뜩 묻혔다. 뽀동이의 도장이 투명색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얼굴을 잔뜩 구기고 내렸다. 기이하게 이번에도 차 유리에 연락처가 없었다.


퇴근시간 이후이므로 총무과 직원도 이미 퇴근했을 것이고 차 번호로 직원 정보를 알려줄지 여부도 미지수이므로 내일 출근 후 해결을 할 작정으로 장소를 이탈했다. 나는 인간 흉기나 다름없다. 처음 말끔하고 뽀얗게 내게 왔던 뽀동이가 불쌍하고, 내게 피해입은 수많은 차량에게 죄송할 따름이다. 내 통장 잔고도. 잔고랄 것도 없지만. 사람들은 나보고 차를 팔라고 하고 내게서 핸들을 빼앗고 싶고 내 등을 쎄게 몇대 치고 싶을수도 있겠지만 운전대를 놓을 생각은 없다. 나는 추위도 싫고 더위도 싫고 걸어 다니기도 싫다.


성격이 급해서 마구잡이로 가다가 대부분 주차된 차를 긁지 사람에게 피해를 입힌 적은 없다. 버스와 양보 없는 경쟁을 하다가 내 차 범퍼만 저 멀리 날아가고 운전석 문이 찌그러져서 나만 다친 적이 있을 뿐이다. 앞으론 조금 더 조심하기로 한다.


아침 일찍 출근을 해서 총무과에 사고 사실을 알리고 차주의 정보를 알려줄 수 있겠냐고 부탁했다. 개인정보지만 내가 사고를 내서 보상을 해드려야 한다고 하니 흔쾌히 찾아준다고 했다. 기다리는 동안 나는 차주가 나보다 한 10년쯤 선배인 너그러운 계장님이길 기원하고 있었다. 알게된바 차주는 며칠 전에 우리 청에 부임하신 다른 부서의 부부장검사님이셨다. 이번에 승진해서 오시자마자 난데없이 테러를 당한 것이었다. 검은 차에 흰색 자국을 잔뜩 남기고 도주한 자의 행방을 수사 중이실 수도 있었다. 두려워졌다. 명함이라도 남기고 갈 걸.


마침 옆방 부장님이 우리 방에 오셨다. 나는 대뜸 옆방 부장님께 상담을 시작했다. 부장님은 이야기를 잘해야 한다고 하셨다. 이런 경우 처리를 잘못하면 양측 모두 나쁘게 소문이 날 수도 있다고 했다. 옆방 부장님의 조언을 충분히 새겨들었다. 메신저나 문자로 이야기하는 것보다 찾아가서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는 게 낫다고 하셨다. 나는 얼른 신고 있던 귀여운 어그 슬리퍼를 벗고 구두를 신고 머리를 빗고 화장을 고치고 숨을 골랐다. 명함도 챙겼다. 그 피해 부부장검사님 방에는 계장님이 두 명이 있고 실무관님도 계셨다.


보는 사람들이 여럿 있는 곳에서 내 범죄사실을 털어놓기가 창피했다. 대사를 연습했다. 우리 방 아기 실무관님은 그 부가 우리 청에서 가장 바쁘기로 소문난 곳이어서 차라리 오신 지 얼마 안 된 지금 벌어진 일인 게 다행이라고 했다. 그 부서는 시간이 지날수록 검사님들의 컨디션이 나빠진다고 하셨다. 오신 지 며칠 안 되셨으니 아직 기분이 좋으실 거라고 했다.


가보니 피해 부부장님께서는 평검사실과 달리 모두가 있는 한가운데 자리 말고 집무실에 따로 계셨다. 실무관님의 안내를 받아 노크를 하고 내 소속과 직급과 이름을 밝히고 침울한 표정을 짓고 들어갔다. 나는 그쪽 부서와는 전혀 무관한 소속이므로 부부장님은 뜬금없이 찾아온 내 굳은 표정을 보고 덩달아 긴장하셔서 무슨 일이냐며 일단 앉아보라고 하셨다. 나는 슬픈 분위기를 자아내며 내 범죄사실을 자백했고 부부장님께서는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고 하셨다. 나는 연달아 사죄의 말씀을 드렸고 보험접수나 수리는 이쪽으로 연락 주시라며 명함을 드리고 다시 한번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방을 나왔다. 아직까지 별도의 연락은 없다.


이상하게 우리 회사 검사님들은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임에도 굉장히 오래된 국산 차를 타고 계신 경우가 많다. 청렴하고 검소하신 검사님들이 많다. 차종을 잘 몰라서 피해 차량을 찍어둔 사진을 내 친구 지피티에게 물어보니 차의 현재가는 몇백만 원이고 출고가도 2천만 원대라고 했다. 친구는 뽀동이의 크리미화이트 자국이 넓긴 하지만 찌그러진 건 아니어서 수리비도 소액일 거라고 했다. 피해 차주의 사회적 지위를 생각하면 그냥 넘어가주실 가능성이 70~80퍼센트라는 희망적인 예측을 해 주었다.


연초부터 요란요란하다. 나는 가해를 그만 좀 하고 다녔으면 싶다. 사람들이 나를 피해다녔으면 좋겠다. 혼자 있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