多情歌

다정도 병인양 하여,

by Ubermensch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 제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양 하여 잠못 이뤄 하노라


-이조년, 병와가곡집(甁窩歌曲集)








다정이 병인 사람이 있다. 본인에게도 병이 되고 그 다정을 함부로 끼얹은 사람에게도 병을 남긴다. 나는 다정한 사람이 무섭다. 너무 강한 자취를 남기기 때문이다. 원래 한겨울에 난방을 안 하고 지내는 사람은 추위에 익숙해서 스스로의 삶이 그렇게 추운지 잘 모른다. 손발이 보랏빛으로 변하고 조금 건조하고 굳어져 있다 한들 사람은 주어진 환경에 이내 적응을 하기 때문에 아주 극단적인 정도가 아닌 이상 그런 채로 충분히 익숙하게 지낼 수 있다.


괜히 잠시 비현실적으로 따뜻한 곳에서 몸이 녹아 노곤노곤해졌다가 원래 있던 혹한의 장소로 내몰리면 더 춥고 서럽고 고통스럽게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굳이 일시적인 난방 장소에 가지 않으려는 편이었다. 낮은 온도에서 사는 일은 익숙해지고 단련만 된다면 그렇게 불편하거나 고통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외투를 잘 껴입고 엄살을 부리거나 요란을 떨지 않으면 충분히 감수할 수 있는 정도다.


그런데 굳이 과잉 보호를 하며 목도리를 둘러주고 뜨끈한 국물을 호호 불어 먹여주고 핫팩을 손에 꼭 쥐어주며 따뜻한 온기로 감싸안았다가 순식간에 그 모든걸 다 회수하고 원래 있던 곳에 밀어버리고 떠나간 사람이 있었다. 다정에 병든 사람이었다. 나는 느릿느릿 어쩌면 조금 절름절름 길을 걷다 느닷없이 교통사고를 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본인도 의도치 않게 나를 치고 마음이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것 같아 보이긴 했다. 나는 분해서 내가 흘린 피를 마구 뿌렸다. 가는 길이 편안하지 않도록.


그 다정은 연인과의 그것과 성격이 달랐다. 나는 애초에 남녀간의 사랑은 근본적으로 믿지 않는 편이므로 연인에게 푹 빠지거나 완전히 의지한 적은 없었다. 그건 좀 다른 종류였다. 내가 평생 바랐던 이해와 보호와 안정에 가장 가까웠던 경험이어서 쉽게 잊히지 않았다. 사실 내 질병 중에는 무한 영상 재생이 있어서 망각이 잘 안되는 문제가 있다. 그래서 괴롭다. 그래서 괴롭히고 싶다. 다정이 잘못이냐고 묻는다면 잘못이라고 해야겠다. 섣부르고 지속 불가능하고 책임지지 못하는 다정은 잘못이다. 결코 요청하거나 구걸한 적이 없는데 굳이 타인의 인생에 주제넘게 깊게 파고들어 사람을 안심시켜버리면, 정말 경험이 없고 잘 모르고 위태로웠던 사람은 잠시라도 구제된 그 감각을 평생 잊을 수가 없기 때문에.


차라리 안 받는게 나았던 호의가 있다. 모르는게 더 좋았던 상태가 있다. 나는 그래서 타인의 삶에 쉽게 개입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인생을 감히 구조하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칫 혼란한 사람의 세계를 뒤흔들 위험이 있다.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 어떤 결과도 감당할 만큼 다정(多情)하거나 무정(無情)할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닌 이상은.


이건 그냥 감사와 원망과 그리움에 관한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