컵라면을 먹으면 안 되는 사람

by Ubermensch







나는 사람들과 함께 점심을 먹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다. 자기 직전까지 술과 야식을 식도까지 꾸역꾸역 밀어넣고 바로 눕기 때문에 점심에 딱히 배가 고프지도 않고, 사람들과 날씨나 티비 프로그램이나 일상 주제로 스몰토크를 하는 것이 썩 편안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 구성원으로서 부득이하게 참여해야 하는 고정 점심이 주 몇 회 정해져 있다. 점심 약속이 없는 점심시간이 가장 좋다. 여자 휴게실에 가서 잠을 자기도 하고 혼자 사무실에 앉아 글을 쓰기도 하고 내 친구 챗 지피티와 대화를 하다 보면 시간이 금방 간다.


아무 약속도 없는 소중한 금요일 점심날, 나는 자리에 앉아 글을 쓰고 있었다. 쓴다기보다는 토하기 때문에 그렇게 긴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완성을 하고 저장을 누르는데 등 뒤로 난 문으로 부장님이 나오셨다. 밥은? 별로 배는 안 고팠지만 걱정을 하실까 봐 컵라면 먹으려고요. 했다. 왜 컵라면을 먹어? 컵라면을 먹을 수도 있죠. 운곡공파가 컵라면을 먹으면 어떡해.


부장님은 나가서 설렁탕을 먹자고 하셨다. 좋아요. 설렁탕집은 반찬이 깍두기랑 김치밖에 없으니까, 회전초밥집에 가자. 좋아요. 내가 뭐든지 다 좋다고 하는 예스걸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사실이 아니다. 만약 부장님이 피자나 돈가스나 제육덮밥을 먹으러 가자고 하셨다면 안 들리는 척하면서 대답을 안 했을 거다. 회전초밥집에 갔더니 웨이팅이 길었다. 부장님은 전복돌솥밥을 먹으러 가자고 하셨다. 좋아요. 나는 국밥과 해산물을 좋아한다. 부장님은 내가 좋아하는 메뉴만 제안하셨다.


문득 궁금해졌다. 제가 혼자 있는 걸 어떻게 아셨어요? 인기척이 났나요? 했다. 아, 컵라면을 먹으려고 나갔어. 운곡공파는 컵라면을 먹으면 안 된다면서요. 제가 따져보기 전까지 부장님은 어떤 파인지 모르셨죠? 알았지. 일부러 모르는 척했던 거야. 제가 부장님의 고조할머니 항렬이라면 좋았을 텐데.


드높으신 직장 상사와 단둘이 밥을 먹는 일은 사회성이 부족한 부하직원으로서 썩 편안한 일이 이 아니다. 뭐라도 대화 주제를 꺼내 분위기를 띄워야 할 것만 같고. 나는 전복돌솥밥을 입에 가득 넣고 오물오물 씹으며 한참을 고민하다 마침내 대화 주제를 고안해 냈다. 부장님 사모님은 예쁘신가요? 다른 이야기 하자. 예. 우리는 다시 침묵에 잠긴 채 전복 돌솥밥을 먹었다. 저기 실무관님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시길래, 제 히피펌 때문인가 했는데 생각해 보니 부장님을 모셨던 분이시라면서요. 제가 아니라 부장님 때문인가 봐요. 아무도 머리 신경 안 써. 예.


점심시간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부장님, 저 커피 마시고 싶은데 시간이 별로 안 남았어요. 그렇네, 커피 사주고 싶은데 시간이 별로 없네. 커피 마시고 싶은데 시간이 별로 없어서 아쉽다. 휴. 아침부터 커피 마시고 싶었는데. 그러게. 아쉽네. 부장님은 커피를 사달라는 내 속뜻을 못 알아들으신 척하며 성큼성큼 걸어가셨다. 그리고 스타벅스 문을 훅 여셨다. 나는 결국 카페라떼를 손에 쥐고 나와서 방긋 웃으며 부장님 뒤를 따랐다.


나는 지금까지 컵라면을 먹으면 안 되는 사람인 줄 몰랐다. 컵라면 참 맛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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