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내 장르 피신
우리 부서는 대외적 이미지가 유유자적이다. 10시간 이상 야근을 하면 부정초과근무가 의심된다고 한다. 부서 내 실적 1위인 우리 검사실만 예외다. 우리 부장님과 나만 죽어라 일과 야근을 한다. 나는 지난주부터 최소 격일로 조사를 했다. 어제도 오늘도 피의자를 불러다 앞에 두고 대면 조사를 했다. 피해액이 10억 원에 이르고 온갖 종류의 영장이 집행된 복잡한 구속사건, 전세 사기 사건, 수년 묵은 까다로운 재기수사명령사건 등 빡빡한 조사 일정을 소화하느라 주말에도 출근하는 공노비가 되었다. 주말에 출근하면 운동복 바지를 배까지 끌어올려 입고 계신 부장님이 반겨주신다. 나는 한동안 발레학원도 못 가서 유연성을 잃었다.
어제 오후 3시 넘어 시작한 조사는 밤 9시가 넘어 마무리됐다. 말을 많이 해서 배가 많이 고팠다. 지금까지는 피조사자가 늘 홀로 조사받으러 왔는데, 최근에 온 피의자들은 하나같이 근엄한 변호사를 대동하고 왔다.
어제는 몇년 전까지 이 부서 부장검사로 근무하셨다는 전관 변호사님이 우리 사무실을 방문했다. 그는 조사 예정인 구속 피의자가 호송되기도 전에, 내게 찾아와서 말했다. 요즘은 중경단에서 구속 사건도 받나 보지? 오 우리 실무관님 나 아는 것 같은데? 몇 년 전에 내가 여기서 근무했던 것 같네요.라고 말씀하셔서 나를 즉시 공손하게 만들었다.
조사자로서 변호인이 동석하는 첫 신문인데, 법조 경력 30년 이상의 검사 출신 전관 변호사를 앞에 두고 피의자를 상대해야 하다니. 베테랑 전문가로부터 수사능력을 평가받는 느낌이라 불편했다. 그분을 아신다는 우리 실무관님 말에 의하면 그 변호사님이 우리 청에 근무할 당시 몹시 꼬장꼬장한 옛날 할아버지 스타일의 검사님이셨다고 했다.
앞자리 대장군 계장님께서는 그러거나 말거나 지금은 내가 갑이니 당당하고 단호하게 변호사의 간섭은 잘라버리면 된다고 조언해 주셨다. 하지만 꼬장 변호사님은 나와 한참이나 대화를 나누고 나서, 내가 우리 사무실에서 가장 상석 계장 자리에 앉아있음에도, 내게 물었다. 그런데 계장님은 어디 계시죠? 제가 계장입니다. 저 옛날 부장검사 출신 할아버지 변호사님 눈에는 내가 계장처럼 보이지도 않는가 보다. 내 자유분방한 히피펌 헤어스타일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피의자는 10억의 금품을 들고 기나긴 도피생활을 하며 경찰과 추격 영화를 찍었는데, 어느 해안가에 앉아 있던 중 성명불상의 사채업자로부터 김치통에 숨긴 금품을 강탈당했다고 했다. 이 과정조차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나머지, 현실에서 실제로 벌어졌다고 믿기 어려웠다. 조사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피의자를 처음 만난 꼬장 변호사님은 그 이야기를 듣고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사채업자 이름도 모르고, 바닷가에서 우연히 김치통을 뺏겼다고? 하며 전직 검사 모먼트로 피의자를 추궁하기 시작했다.
꼬장 변호사님은 피의자에게 사실대로 말을 해도 큰 차이가 없을 거라고 조언했다. 검사생활을 수십 년 했으니 피의자의 말이 말 같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 부장님도 내 조사 말미에 나오셔서 도주 중 정처 없이 떠돌다 우연히 도달한 해수욕장에서 실존 인물과 약속을 잡아도 마주치기 힘들겠다며, 실제로 존재하는지 알 수 없는 성명불상의 사채업자에 관해 물어보셨고, 나는 터지는 웃음을 참는 일에 실패했다.
조사가 야간까지 길어졌다. 피의자의 인권은 소중하기 때문에 교도관이 밥을 먹이러 갔다. 정작 나와 부장님은 밥을 못 먹었다.
오늘은 또 다른 사건의 조사가 있었다. 피의자는 내 앞에서 눈물을 또르르 흘렸다. 나는 동요했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무심한 척했다. 감사할 게 없는데도 피의자는 내게 감사 인사를 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부장님이 말씀하셨다. 사건기록을 보지 않고 피의자신문조서만 읽어도 사건 파악할 수 있도록 조서를 만들어야 해.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조사를 많이 많이 해봐. 많이 많이 하겠습니다. 부장님 저 오늘에서야 수사와 기소가 분리되어야 한다는 말 이해할 수 있게 되었어요. 왜? 기록을 볼 때는 분명 이만큼 처벌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는데 앞에 두고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인간적으로 이해되는 부분이 생겨서 만약 제가 조사 후 처분까지 결정해야 하는 입장이라면 감정이 개입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수사와 기소가 분리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기소하는 입장에서는 그럴 여지가 없이 기록과 증거관계만 보고 판단할 수 있게요. 그럼 또 왜곡돼.
그리고 다음엔 고소인을 불러서 조사해 봐. 그러면 피의자를 사형시키고 싶어 질 거야. 어차피 피의자가 혐의 다 인정했는데 고소인을 불러서 뭐해요? 이야기를 들어봐야 제 마음만 아프잖아요. 꼭 불러야 하나요? 응 불러.
그리하여 고소인은 다다음주에 오기로 했다. 부장님은 내가 조사를 2천 번쯤 해봐야 한다고 했다. 나도 2천 번쯤하고 싶다. 하지만 슬픈 고소인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다. 오늘 슬픈 피의자의 입장을 듣는 것만도 벅찼다. 하지만 2천 번을 채워야 하니 어쩔 수 없다. 슬픈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 않다. 부장님은 내일 모레 참치를 먹으러 가자고 하셨다. 내가 좋아하는 물고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