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촉매가 되는 냄새
아주 오랜 기간 만났던 친구가 있다. 그 애는 마치 커다란 개 같아서, 종종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며 곱슬곱슬한 머리통을 나에게 들이밀곤 했는데, 거기선 항상 고소한 견과류 냄새가 났다. 머리를 며칠 동안 감지 않고 세수를 하지 않아도. 본인 말에 의하면 자기는 상남자이기 때문에 딱히 로션 같은 걸 바를 필요도 없다고 했다. 잘 씻지도 않고 고양이 세수만 했는데, 그 지저분한 얼굴 이곳저곳ㅡ코, 인중 등 가까이 냄새를 킁킁 맡아봐도 보송하고 고소한 냄새만 나서 고솜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따금씩 아주 몹쓸 짓을 해서 머리를 세게 쥐어박고 싶어지는 순간에도, 그 아기 같은 냄새에 마음이 포곤하게 풀려버릴 때가 많았다. 그리고 우리 집 고양이들 미간의 빼곡한 털에서도 유사한 느낌의 콤콤하고 포곤한 봉제인형 냄새가 난다. 내 생각에 그 애는 전생에 들개였는데, 아마 진화가 덜 된 채 인간으로 환생한 게 아닌가 싶다.
타인의 체취에 대한 호불호는 호르몬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한다. HLA라는 면역 유전자가 적당히 다른 사람의 냄새를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고, 사람마다 후각 유전자가 달라서 같은 냄새를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고 한다. 또 호르몬 상태와 감정 상태에도 영향을 받는데, 스트레스·우울·불안·사랑 등 감정과 호르몬 변화가 냄새 인지와 선호도에 영향을 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 애에게 마음이 떠난 후 머리 냄새를 다시 맡아봤을 때, 고소한 견과류 냄새는 더이상 맡을 수 없었다. 연인 관계에서 서로의 체취를 좋아하는 경우 그 관계의 만족도가 높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향에 대한 감각은 이성적 판단 이전에,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향을 맡았을 때 순식간에 어떤 시절이나 장면이 펼쳐질 때가 있다. 향은 무형(無形)이라 눈에 보이지 않지만, 특정 기억을 불러일으키는데 강력한 촉매제가 된다. 문득 바람에 실려온 라일락 향에서 어린 시절 함께 뛰어놀던 동네 친구들이 떠올라 아련해지기도 하고.
나에게는 어떤 고유의 체취가 날지, 그게 어떤 종류의 인상으로 닿을지 궁금하다. 체취는 연인이나 가족 정도의 아주 가까운 사람만이 맡을 수 있기 때문에, 일반적인 거리의 사람들은 나에게서 아마 향수 냄새를 맡을 거다. 바이레도 Rose of no man's land 라는 향수를 몇 년째 매일 사용 중인데, 특별히 호평을 들어본 적은 없지만 무인지대의 장미라는 네이밍도 근사하고, 너무 뻔하게 예쁘거나 과하게 여성스럽지 않다는 점이 마음에 들어 쭉 쓰고 있다.
오늘은 비가 많이 왔다. 비 내리는 여름 특유의 아득한 물비린내가 지나간 내 여름들을 떠올리게 한다. 고소한 정수리 냄새를 풍기던 큰 개 같던 그 친구와 함께한 시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