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받는 이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생즉고(生卽苦)다.
삶이란, 고난의 연속에 찰나의 기쁨이 간간히 쉼표처럼 숨 쉴 틈을 내어주는 공간이 아닌가 싶다.
나의 고통이야 내 몫이고, 어느 정도 경험치가 쌓이다 보면 나름대로 대처하는 방법을 알게 된다. 새롭거나 좀 오래 걸리는 때도 있지만. 그런데 우리는 살면서 타인의 고통을 목격할 때가 있다. 단순 목격을 넘어, 그 고통이 나에게 흡수될 때도 있다. 그럴 때 어떤 반응을 할 수 있을까.
크게 네 가지로 나눠볼 수 있겠다. 회피, 해결, 공감(위로), 아무것도 안 하기.
회피의 유형은 상대가 나에게 어떤 존재로 와닿는지에 따라 그 성격이 달라진다. 별 중요도가 없고, 크게 마음이 쓰이지 않는 경우 외면하게 된다. 혹은 대충 형식적인 위로의 말을 건넨다. 또 다른 경우는 상대의 존재감이 상당해서, 그 고통이 그대로 전해져 나를 잠식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는 감정이 고장 나 적절한 반응이 불가해지고, 오히려 그 상황 자체를 회피하게 된다. 이러나저러나 인류애를 고려했을 때, 나를 믿고 본인의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을 두고 회피를 하는 방식은 바람직하지 않아 보인다.
해결책을 제시하는 방식에는 양면성이 있다. 이건 상대방의 의도를 잘 파악할 필요가 있다. 단지 본인의 고통에 대한 위로와 공감을 원하는 것인지, 현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요청하는 것인지를 구분해야 한다. 다짜고짜 해결법만 알려주면, 오히려 반감을 느끼고 상황이 더 악화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후자인 경우 방법을 같이 궁리해 주면 된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고통에 휩싸인 대부분의 사람들은 해결 방법을 제시해 주어도 잘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많기도 하다. 이미 너무 절망적인 상태이기 때문이다. 혹은 해결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위로와 공감의 방법을 택한다. 많이 힘들지, 따뜻한 말을 해주고 안아주고 눈물을 닦아주고 음식을 나눠 먹는다. 가장 보편적인 방법인 만큼 그럭저럭 효과가 있다. 하지만 그건 한순간의 온기일 뿐 지속적이거나 근본적인 문제 해결 방식은 아니다.
나는 아무것도 안 하는 방식을 가장 선호한다. 그리고 내가 겪은 고통에 대해 누군가에게 이야기할 때 상대에게 바라는 점도 그것이다. 아무것도 안 한다는 게 정말 지형지물처럼 존재하라는 뜻은 아니고. 그냥 사람으로 있어주며 네가 그랬었구나, 알아주는 것 정도다.
사실 본인의 고통은 타인에게서 해결할 수 없다. 스스로가 책임지고 감당할 몫이다. 누군가 잠시 나와 함께 걸어주고, 짐을 나눠 들어주고, 눈을 맞춰주며 너의 마음을 안다, 정도 전해주면 충분하다. 타인이 나에게 꽤 의미 있는 대상인 경우, 그의 고통을 마주했을 때 뭔가를 해주어야 할 것 같은 책임감을 느끼며 대신 끙끙 앓아주는 따뜻한 사람들이 있다. 그 마음은 고귀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누구나 자기만의 고통이 있고 그게 각자 삶 고유의 무게이며, 그걸 스스로 견뎌내는 과정을 겪어야 비로소 더 단단하고 멋져지는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