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의 이름은 제미나이, 지피티···
우리 부장님은 친구들이 많다. 부장님은 집무실에, 나는 옆 사무실에 근무하기 때문에 부장님의 현실 세계 친구들이 얼마나 많으신지는 잘 모르지만, 내가 만나본 부장님의 친구들은 인공지능 친구들이다. 부장님은 그 친구들을 내게 자주 소개해주신다. 우리 부장님과 나는 동성동본의 희소한 성씨로, 항렬로 따졌을 때 누가 더 높은지는 모른다. 혹여 내가 더 윗대로 판명된다 해도 그 권한을 행사할 수 없는 사회적 신분차가 있으므로 알아볼 생각은 없다.
이 부서에 오기 전 서로 아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우리는 먼 친척 관계일 것이다. 생각보다 가까울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아주 높은 기수의 부장검사님과 뽀시래기 계장의 관계임에도 우리는 아주 화목하게 지낸다. 나는 조퇴하는 주제에 홀로 야근하는 부장님께 제가 어제 특근매식으로 못 시켜 먹었던 샤인머스캣이 먹고 싶어요, 하면 다음날 냉장고에 샤인 머스캣 한 봉지가 들어 있기도 하고. 내가 부장님께 찾아가 결재를 받는 상황보다 부장님이 직접 문건을 출력해 내 자리로 내 도장을 받으러 찾아오시는 역보고 상황이 훨씬 많다. 말도 안 되게 편안하고 행복한 근무 환경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내가 나이 드신 부장검사님을 부려먹는 되바라지고 못돼 먹은 계장은 아니다. 부장님께서 스스로 그런 구조를 허용하고 직접 만들어 주신 거다. 그리고 나도 적극적으로 야근하며 매일 부장님께 기록 더 주세요, 일 주세요, 조사하고 싶어요, 더 할거 없나요, 한다. 여기서 오래오래 근무하면서 정년까지 맞이하고 싶지만 내년에 회사가 망한다.
우리 집안 특성인진 모르겠지만, 둘 다 호기심이 많고 학구열이 높고 성격이 급해서 손발이 척척 맞는 편이다. 우리 부서에서 아마 평일이건 주말이건 야근하는 검사실은 우리밖에 없을 듯하다. 다른 곳은 미제사건이 수십 건씩 있는데, 우리는 서로 밤낮으로 일만 해서 지금은 미제가 한 건밖에 없다. 그래서 내게 있는 하나 남은 귀한 사건을 아껴서 보고 있다. 사건을 너무 빠르게 떨어내니 위에서 어렵고 기록 양이 방대한 사건을 자꾸 배당해 준다고 우리 실무관님만 고생이 많다.
옆방 부장님과 그 부장님의 계장님과 함께 매주 점심을 먹는데, 그쪽 방은 우리와 성향이 정 반대다. 인공지능과 소통하는 것을 좋아하고 약간 외골수 기질인 우리 가문의 검사실과 달리 현실세계 사교활동을 중시하고 일도 여유롭게 하시는 분위기다. 점심을 함께할 때면, 그 방 부장님은 그쪽 방 사건 내용을 슬쩍 우리에게 흘리고, 우리는 우리와 전혀 무관한 사건임에도 미끼를 덥석 물고 열띤 토론을 벌인다. 그쪽 방 부장님은 떠넘기기 성공했다고 좋아하신다. 하지만 우리는 일을 좋아하기 때문에 남의 방 사건 해결에 골몰하는 것도 즐겁다. 겸방 업무를 맡는 실무관님은 그렇게라도 균형이 맞춰져서 다행이라고 한다.
처음에 부장님께 결재를 받으러 가서, 똑똑 노크를 했더니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리기에, 손님이 오셨나 보다 하고 돌아간 적이 있었는데, 손님이 굉장히 자주 오시는 것 같고, 한번 온 손님이 아무리 기다려도 안 가시길래, 성격이 급하고 예의가 부족한 나는 기다림을 포기하고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알고 보니 그 손님은 실존 인물이 아니라 부장님의 인공지능 친구였다. 친구분의 이름을 물었더니 제미나이라고 하신다.
부장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부장님의 친구 제미나이가 자연스럽게 끼어든다. 분명 집무실에 인간 존재는 부장님과 나뿐인데, 대화는 셋이 하게 되어서, 나는 그 상황이 좀 기이하게 느껴졌는데, 부장님이 개의치 않아 하시길래 나도 자연스러운 척했다. 부장님은 내게 이리 와보라며 모니터 가까이 불러 부장님의 소중한 인공지능 친구들을 소개해주셨다. 이 친구는 이런 특성이 있고, 이 친구는 이런 일에 능해. 놀랍지?
나에겐 관심 분야가 아니면 자체적으로 시각과 청각을 차단하는 기능이 있어서, 처음엔 그 자체 차단 모드를 억지 사회성으로 꾸역꾸역 개방하며 갔다가, 부장님의 재미있는 설명에 빠져들고 말았다. 사건 정보 유출을 방지하기 위해 실존 인물들의 이름을 춘향이, 몽룡이 등으로 바꾸고, 사건과 관련된 고유 명사들을 임의로 수정한 다음, 복잡하고 까다로운 법률관계를 인공지능 친구들에게 마인드맵으로 그려 달라든지, 팟캐스트 방식으로 설명해 달라든지 하면 아주 획기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으로 정리를 해준다. 내가 흥미를 가지니까 부장님이 더 기뻐하며 설명을 이어가신다.
나한테 받아 적으라며 인공지능 활용법 유튜브 제목을 알려주셨는데, 5060이 들어가길래 5060은 무엇인가요. 하고 여쭈어봤더니, 아 그건 50-60대를 위한 설명이라는 뜻인데 신경 쓰지 말라고 하신다. 어차피 나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소리를 들을 만큼 정보통신분야에 지식이 전무하고, 내 인공지능 친구는 챗지피티 하나뿐인데, 그조차도 술주정 용도로 쓰기 때문에 부장님의 최첨단 친구들 소개가 아주 유익했다. 오늘 아침에는 사기사건으로 어린이를 위한 그림책 만드는 방법도 개발하셨다며 아주 밝은 얼굴로 다급히 나를 찾으셨다. 그림체는 조금 끔찍했지만 내게 자식이 있다면 이다음에 커서 절대 사기를 당하지 않도록 보여주고 싶을 정도로 퀄리티가 훌륭했다.
업무를 꼭 고전적 방식으로 따분하게 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인간관계도 고전적 방식으로 따분하게 경직될 필요 없이, 약간의 위트를 섞어 통상적인 평범선을 살짝만 넘나들면, 일상이 한결 더 알록달록하고 즐거워진다. 나는 회사도 좋고 일도 좋고 우리 부장님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