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색 장우산 절도사건
일요일 아침부터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에 잠이 깬다. 한 때 내 옆자리에 앉아 계시던 인간 일기장 선배님은 비 오는 날마다 늦잠을 주무셔서 지각을 하곤 했다. 비 오는 날은 침대가 노곤노곤한 몸을 끌어안고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나도 그 비 오는 날 특유 온습도의 포근함에 쉽게 놓여나지 못하고 낑낑거리다 간신히 몸을 일으킨다. 생명을 움트게 하는 봄비나, 초록을 빛내는 여름비와 달리, 가을비는 쓸쓸하고 처연한 느낌을 주긴 하지만. 그 나름의 운치가 있다. 커피를 홀짝이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글쓰기 좋은 날이다.
나에겐 예쁜 하늘색 장우산이 있다. 예전 사무실 우산꽂이에 칙칙한 감색 공용 우산들 사이 내 하늘색 우산을 꽂아 두었다. 아침에 분명 봤는데, 점심을 먹으러 가려고 보니 내 우산이 사라져 있었다. 사무실의 모든 사람을 의심하고 다녔다. 믿을구석 비빌언덕 검사님이 이전에 나한테 우산을 빌려달라고 한걸, 그러면 저는 비를 맞고 가나요? 하며 모질게 거절했던 기억이 떠올라서 냉큼 찾아갔더니 자리에 안 계셨다. 할 수 없이 칙칙한 공용 우산을 들고 점심을 먹으러 가면서, 내 하늘색 우산을 가져간 사람을 찾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생각에 밥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점심을 먹고 돌아와 양치를 하고 있는데, 뽀시래기 수습이 내게 달려와 계장님 우산 찾았다고 전해준다. 범인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얼버무린다. 용의자는 내가 전혀 친분이 없는 검사님이었다. 전에 내 우산을 사용하는 걸 본 적이 있다는 제보를 받았고, 뽀시래기가 선뜻 대답을 못하는 것으로 보아 그 검사님이 범인이 확실해 보였다. 친분이 전혀 없고, 사회적 지위의 차이가 좀 크긴 하지만, 그대로 두면 검사님의 절도 행위가 계속 이어질 것이므로 단단히 이야기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전에 대화를 나누어본 적이 거의 없었지만, 할 말은 해야 하니까 우산을 들고 무서운 기세로 자리에 찾아갔다. 검사님, 제 하늘색 장우산 검사님이 사용하셨나요. 이건 공용 우산이 아니에요. 제가 이름표를 붙여두었으니 앞으로 쓰시면 안 됩니다.라고 말했다. 검사님은 당황해 버벅거리시며, 캐비닛에서 본인의 우산을 꺼내더니, 죄송합니다 계장님. 대신 제 우산을 쓰세요, 하시길래. 아, 검사님의 우산이 따로 있으셨음에도 제 우산을 가져가신 거네요. 그 우산은 필요 없습니다. 하고 돌아서 가버렸다. 그 이후 검사님은 내가 지나갈 때마다 죄송하다고 했다.
이후 회식 자리에서 그 검사님을 상대로 피의자 조사하듯 제 우산을 몇 번이나 사용하였는가요, 이유는 무엇인가요, 하며 취조했고. 검사님은 다른 검사가 써도 된다고 했다. 교사범이 따로 있다. 그 우산이 좋아 보였다. 나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라며 변명했다. 그렇게 하도 난리를 쳐서 사무실 모든 사람들이 내 하늘색 우산은 건들지도 않게 됐다. 예전 부서에서의 즐거운 추억이다.
5월의 어느 비 오던 날, 하늘색 블라우스를 입고 하늘색 장우산을 들고 법원에 가던 길에, 기록이 실린 수레를 엎었다. 손이 모자라 우산을 바닥에 내려놓고 기록을 추스르고 있는데, 이상하게 내 몸에 닿아야 할 빗방울의 감촉이 느껴지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모르는 사람들이 바닥에 놓아둔 내 우산을 들고, 내가 기록을 챙기는 동안 비를 맞지 않도록 우산을 씌워주고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 하늘색 셔츠를 입은 우리 검사님이 보였다.
그날은 법정에 핸드폰을 두고 와 다시 돌아가야 했고, 하늘색 셔츠를 입은 검사님은 나를 향해 뛰어왔고, 나는 한평생 몰랐던 내 병을 알게 됐고, 태훈이라는 남자애는 내게 뽀뽀를 했다. 내 인생의 방향이 크게 달라졌던, 5월의 어느 우중 하루가 떠오르는 날이다.
비는 사람을 생각하게 만든다. 이건 중의적 문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