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반짝 광안리
집필이라는 말을 쓰니 왠지 그럴싸한 작가가 된 기분이 든다. 추운 지방의 북방 오랑캐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경기 남부도 기후가 온화하게 느껴졌는데, 우리나라 아주 남쪽의 남쪽인 부산은 더욱 포근하게 느껴진다. 내 꼬꼬무식 생각법에 따라 남남북녀가 떠오른다. 나는 북쪽 여자니까 남쪽 남자가 보기에 예쁘게 보일까? 내 눈에는 부산에 잘생긴 남자들이 많아 보인다. 사투리도 멋지고. 살면서 경상도 땅을 몇 번 밟아본 적은 없지만, 나는 오래전부터 경상도에 이유 모를 로망이 있어서, 누가 경상도 말만 쓰면 일단 조금 반하고 보는 경향이 있다. 왠지 박력도 꽤 있어 보이고.
오늘은 원래 부장님들과 함께하는 점심날인데, 그저께 연가를 쓴다고 말씀을 드리고 결재를 올렸지만 부장님이 알겠다고 하셨으면서 왜인지 하루 종일 결재를 안 해주셨고, 그다음 날 출근해도 안 되어있길래, 부장님께 연후 전후 반가로 바꾼다고 하니 이상하게도 바로 결재를 해주셨다. 별 미제사건도 없고 내가 반가를 이틀 쓰는 것이나, 하루 연가를 쓰는 것이나 부재하는 시간은 똑같은데 왜 전자는 하루 종일 결재가 안 났고 후자는 바로 났는지 모르겠다. 딱히 상관은 없다. 난 회사가 좋으니까. 그래서 오늘은 오로지 부장님들과 밥을 먹기 위해 회사에 출근했다. 나도 사무실에 얼굴을 비추는 게 마음이 편하다. 부장님이 나를 아주 빈번하게 찾으시므로.
오늘은 점심 무렵 출근하자마자 삼십 분 사이 내 자리를 일곱 번은 다녀가셨다는 부장님이 다급히 나를 부르신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틀 전 내가 부장님, 제가 형법 전문가가 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될까요. 했더니 부장님이 어떤 무료 유튜브 형법 강의를 추천해 주셨는데, 내용은 좋지만 10분만 보면 잠이 드는 부작용이 있기 때문에 연구를 하셨단다. 부장님이 집무실로 나를 데려가 빈 의자를 가리키며 누구 이름을 말씀하시길래 인공지능 친구 말씀이신가 싶어 저 의자에 가상의 친구가 앉아있다는 뜻인가요? 했더니, 아니 아니 저번에 말한 그 형법 강사 이름. 나보고 거기 앉아서 뭘 보라는 뜻이었다.
부장님이 그토록 나를 기다리신 이유는, 부장님의 인공지능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그 유용하지만 따분한 형법강의를 아주 재미있고 흥미롭게 바꿔서, 내가 잠들지 않고 형법 전문가가 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하셨는데, 그걸 너무너무 알려주고 싶으셨던 거다. 그래서 내가 출근하는 시간을 분명 미리 말씀드렸음에도 일곱 번이나 내 자리를 찾아오시며 오매불망 기다리셨다. 오로지 부장님들과 밥을 먹기 위해 1시간 반을 운전해 출근한 보람이 있었다.
점심은 굉장한 고급 식당에 가서 맛있는 소고기를 먹었다. 소고기 먹은 힘으로 장장 6시간의 운전을 해서 무사히 부산에 도달했다. 분명 내 뽀동이에는 크루즈 기능이 있을 건데, 알아보기도 귀찮고 나는 내키는 대로 깜빡이 없이 차선을 바꿔대는 마구잡이 운전법을 선호하기 때문에 그냥 아날로그 방식으로 왔다. 도중 내 옆에 한참이나 따라오며 고함을 치는 레이 차주를 애써 안 보이는척하며 질주했고, 무사히 목적지에 도달해 오른쪽 다리를 절룩이며 내렸다.
이번 연휴에는 우리 회사를 망하게 한 민주당 지지자 가족들을 외면하고 홀로 부산에 와서 글을 잔뜩 생산해 낼 작정으로 집필 여행을 계획한 것이다. 어제 퇴근길 의식의 흐름은 얼른 가서 미리 짐을 싸두는 것이었고, 집 도착 후 의식의 흐름은 더 늦게까지 놀다가 아침에 짐을 싸는 것이었고, 아침 의식의 흐름은 조금 더 자고 회사에서 조퇴하고 집을 들러 짐을 싸는 것이었지만, 오후 의식의 흐름은 집에 들르면 시간이 더 늘어나니 대충 뽀동이에 실린 짐으로 부산행을 택하는 것이었다. 나는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의식의 흐름식 즉흥 인생을 산다. 그러다 보면 불가피하게 소소한 문제와 불편을 마주하곤 한다.
고속도로를 타자마자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는데, 노트북만 챙기고 노트북 충전기를 놓고 왔다는 거였다. 켜보니 잔여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았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상심이 컸다. 황금연휴라 숙소가 비싸서 컴퓨터가 없는 캡슐 호텔로 5박이나 예약했는데. 서울에서 300킬로를 넘게 달려와 예쁜 광안리 바다를 바라보며 글을 왕창 쓰려던 계획을 어떻게 해야 할지 참 난감하다. 몹시 곤란하고. 이래서 사람이 계획을 세우고 차분차분 준비를 하고 다녀야 한다. 내 인생은 항상 이모양이다. 하지만 인생은 계획을 세운다고 해서 꼭 그대로 흘러간다는 보장도 없기 때문에 내 의식이 곧 이 난관을 타개할 방법을 생각해 낼 거라 믿는다. 중간에 배터리가 나가서 여기까지 쓴 게 증발하지만 않기를.
눈앞에 광안대교가 반짝반짝 빛난다. 폭죽도 팡팡 터지고. 지난 5월에도 즉흥 여행으로 이 자리에 앉아있었다. 그때도 당일 오전 회사에서 갑작스럽게 결정했으므로, 차에 있던 필라테스용 집업과 낯부끄러운 하늘색 레깅스를 입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노트북도 급하게 사용절도해서 썼다. 지난번 왔던 날과 오늘의 부산은 기온도 비슷하고, 날씨도 비슷하다. 내가 비를 몰고 오는 건지 그때도 오자마자 흐리다가 다음날 비가 왔는데 내일도 비가 온단다. 나는 아무래도 비의 요정인가 보다. 왠지 촉촉하고 신비로운 존재가 된 것 같아 기분이 꽤 괜찮다.
5월 부산여행은 마치 비현실처럼 행복했어서, 아무 연고도 없지만 내년에 부산에 이사와 살기로 마음을 먹었었다. 그때와는 이런저런 상황이 달라져서 지금은 또 모른다. 내년 이사를 해야 할 무렵 의식의 흐름이 결정해 주겠지. 5월에 왔을 때는 도토리를 볼에 잔뜩 문 다람쥐처럼 생긴 꼬마애도 우연히 만났는데, 그 애는 계단을 세는 특이한 버릇이 있는 아주 살가운 애였다. 처음 보는 내게 끊임없이 조잘조잘 말을 걸어왔다. 그 모습이 몹시 귀여워 포동포동한 뺨을 여러 번 쓰다듬어 주었다. 아직도 그 몰캉하고 뽀시라운 감촉이 손끝에 맴돈다.
강이든 바다든 밤에 보는 물은 깜깜해서 무섭다. 물속에 사는 한 많은 괴물이 생명을 집어삼킬 것 같다. 내일 아침에는 햇살에 반짝이는 윤슬과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보고 밝은 생각을 하고 싶었는데, 일기예보상 하루 종일 비가 온다고 해서 아무래도 다른 무드의 생각을 하게 될 것 같다. 그것도 나쁘진 않다.
내일 부산의 얼굴은 어떨지 궁금하다. 북방오랑캐는 뭘 하고 다닐지도. 뭐 그건 또 내일 의식의 흐름이 결정해 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