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팅

저기.. 예쁘셔서 그런데

by Ubermensch





나는 혼자서는 집 밖을 잘 나다니지 않는 편이다. 내게는 집 안도 위험한데, 하물며 집 밖에는 더욱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고, 사람들이 북적북적한 장소는 안 그래도 민감한 내 후각과 청각을 자극하는 고문들로 가득하기 때문에, 가급적 대중교통조차 이용하지 않기 위해 몸부림친다. 사람이 꽉 찬 엘리베이터도 너무 싫다. 여행도 거의 안 가고, 내 생활 반경은 자차를 이용한 회사-발레학원-집이 끝이다. 긴 연휴라든지, 휴가철에도 사람들이 계획을 물어보면, 그냥 혼자 집에 있을 거예요, 한다. 연애나 해서 남자친구가 계획을 다 세워서 나를 보호하며 품에 챙기고 다녀야만 쫄래쫄래 따라다니는 정도다.


라캉의 욕망이론 속 타자의 시선의 객체와 주체에 대한 대학시절 모 교수님의 강의 내용에 따르면, 그리고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 하릴없이 경성 시내를 배회하던 구보의 성별이 당연히 남성이던 것처럼, 여성들은 목적 없이 길거리를 배회하지 않고, 나 또한 당연히 그렇다. 아무리 이런 히키코모리 사회부적응자 자발적 아웃사이더인 나로서도,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혼자 맨몸으로 집 밖을 나서 세상에 나를 노출시키는 일이 생길 수밖에 없고, 자차를 이용할 만한 상황이 못 되어 대중교통을 이용해야만 할 때도 있고, 도서관이나 서점을 가고 싶어지는 날도 있는 등 뭐 이런저런 공교로운 경우가 있다. 그런 드문 날, 적지 않은 확률로 내 자성에 반응하는 철가루들이 다가온다.


어제는 연휴 집필 목적 여행으로 장장 6시간을 운전해서 늦은 시간 부산에 도착했다. 숙소 내 카페에서 로제 스파클링을 홀짝홀짝 마시며 의식의 흐름식 집필여행이라는 제목의 글 한편을 작성하고 젤리가 먹고 싶어 편의점에 갔다. 편의점에서 체리맛 젤리 한 봉지를 사들고 나왔는데, 선량하게 생긴 남자가 나를 한번 쓱 보더니 느릿느릿 걸어갔다.


나에겐 초능력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남자를 처음 딱 마주한 순간, 그 찰나의 얼굴을 보고 저 남자가 나에게 이성적인 호감을 갖겠군 하는 미래를 단박에 예측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건 대략 96.7퍼센트의 확률로 적중한다. 그들이 나를 처음 본 순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경험상 첫 마주침에서 내가 어떤 인상을 받은 사람들은 각자 시간차만 있을 뿐 대부분 내게 마음 표현을 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 지나가던 선량해 보이는 남자는 나를 지나쳐 느릿느릿 가더니 다시 뒤돌아 잠시 머뭇머뭇하다 내 앞으로 와서, 저 예쁘셔서 그런데 혹시 혼자 여행 오신 건가요? 하고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했다. 본인은 서울에서 왔는데, 나는 어디서 왔냐고 했다. 나도 그렇다고 했다. 혹시 연락처 알려주실 수 있냐고, 내일 시간 되시면 커피 한잔 하자고 한다.


내가 엄청난 미모의 소유자는 아니지만 보통 여자들도 이런 종류의 경험이 꽤 있을 거다. 나 역시 이런 일이 살면서 수십 번은 있었고, 남자친구 있을 때면 저 남자친구 있어요. 하는데, 그럼에도 그냥 친구로 지내자고 한다거나, 거절해도 연락처를 받을 때까지 집요하게 계속 따라오는 경우도 있으므로. 나는 카카오톡 프로필에 내 직업이 검찰수사관임을 보여줄 수 있는 재직기념패를 여러 개 걸어두고 그냥 연락처를 알려준 다음, 저 무서운 사람이니까 일단 제 프로필 사진을 봐주시겠어요? 한다.


그 사람은 내 발레 하는 사진이 예쁘다고 칭찬해 주고서는 본인은 걸릴 게 없다며 내 무서워 보이는 직업을 개의치 않아 한다. 어쨌든 그렇게 그 사람은 내 연락처를 얻어서 내일을 기약하며 떠나는가 해서, 나도 젤리를 먹으러 숙소로 돌아가려는데, 어떤 흰 벤츠가 옆에 서더니 창문을 내리고 잠깐 같이 드라이브 하실래요, 한다. 밤이었고 운전석쪽까지 얼굴이 잘 안보여서 나는 당연히 조금 전의 그 선량남인줄 알았는데, 다음날 확인해본바 제3의 남자였다.


짧은 순간 머릿속에 연쇄살인마 강호순이 떠올라 겁에 질렸다. 선량해 보이는 인상으로 길을 걷던 여자를 태워준다고 유인한 다음에 살인을 했던. 나는 기겁을 하면서 저는 절대 모르는 사람 차에 안 탄다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는 그럼 주차를 하고 다시 온다고 했다. 그러시든지요. 하고 내가 기다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하면서 잠깐 서있는데, 이번엔 딱 봐도 앳돼 보이는 뽀시래기 남자애랑 눈이 마주쳤다.


뽀시래기는 좀 전의 선량남보다는 덜 머뭇거리며 내게 왔다. 짧은 시간 전개된 상황이 황당해서 뽀시래기의 첫 접근 대사가 뭐였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앞선 선량남과 비슷하게 혼자 여행 온 건지, 식사하셨는지 등을 물어보며 본인은 김해에서 친구를 만나러 왔다가 혼자 가는 중인데, 같이 저녁을 먹거나 근처 해변을 산책하는 건 어떠냐고, 나보고 나이가 어떻게 되는지 물었다. 나는 나이가 아주 많을 거라고 뽀시래기에게 말해주었다. 뽀시래기는 스물몇 살 정도로 보였다. 나는 남자를 딱 보고 키와 몸무게와 나이를 실물값에 거의 근접하게 맞추는 초능력이 있다. 역시 정확하게 맞췄다. 뽀시래기와 나는 8살 차이가 났다.


나는 뽀시래기에게 직전 선량남에게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저는 무서운 사람이에요. 하면서 이상한 목적이라면 가라고 했다. 그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혹시 이 편의점 앞이 내가 모르는 부산 내에서 무슨 특별한 지정 장소인 건지, 내가 성매매 여성처럼 보이는지 물어봤다.


당시 내 차림은 숙소에 있다가 편의점에 젤리 사 먹으러 나온 사람답게 평범한 반팔티에 반바지를 입고 크록스를 신고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은 동네 백수 차림이어서, 딱히 성적이거나 유혹적으로 보일 것 같지는 않았지만, 너무 연이어 남자들이 접근하니 좀 이상했기 때문이다. 몇 번이나 다시 물어봤다. 내가 서있던 장소의 특수성에 대해서. 그냥 광안리 대로 앞 평범한 편의점이고, 난 젤리 한 봉지를 샀을 뿐이고, 인근에 유흥 술집 같은 것도 안 보이는데. 이 스팟이 나는 모르는 뭔가가 있는 곳인지.


그 애는 김해 사람이고 부산에 친구를 만나러 온 거지만 자기는 신학을 전공한 사람이라 성매매를 할 생각도 없고 아주 도덕적인 사람이라고 한다. 소방 쪽 일을 하다가 지금은 잠시 쉬고 있고 아빠는 소방관으로 수십 년째 근무 중이시라며 그런 아버지가 자랑스러운 듯 함께 찍은 사진도 보여준다. 부자 모두 인상이 좋아 보였다. 내가 강하늘을 닮았다고 해줬는데 그런 얘기를 많이 듣는단다. 자기가 부산 사람은 아니지만 이 편의점 앞이 내가 계속 물어보는 그런 이상한 스팟도 아닐 거라고 했다.


김해 사람이지만 부산을 잘 아는지 광안리 인근 산책 코스를 안내하길래 우리는 한 시간쯤 같이 걸어 다니면서 젤리를 나누어 먹고, 검찰과 경찰과 공소청과 중수청과 진보와 보수와 윤석열과 김건희와 한동훈과 이재명 등에 대해 이야기했다. 한참 어린 녀석이 나보다 검찰의 역사와 조직과 인물에 대해 빠삭하게 알고 있는 게 놀라웠고, 서로 정치 성향이 비슷해서 사회적 대화가 즐거웠다.


뽀시래기에게 내 연락처를 주었고, 뽀시래기는 나랑 조금 더 시간을 보내고 싶어했지만, 나는 이미 장거리 운전에 지쳤고 모르는 세 명의 남자와 대화하느라고 내게 할당된 사회적 에너지를 다 소모해 버렸기 때문에 이제 들어가 봐야겠다고 했다.


그때 문득, 본인은 꿈에도 상상을 못 하겠지만 내 머릿속에서는 연쇄살인마 강호순에 대입된 채 주차를 하고 돌아오겠다는 그 사람이 떠올랐지만, 이미 시간이 늦었고 나는 뽀시래기의 제안에 따라 이미 그 자리를 떠나버렸기 때문에 좀 미안해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리고 진짜로 강호순처럼 고급 차에 태워가서 나를 죽일 목적이 있었을 수도 있으므로, 차를 놓고 나에게 다시 돌아왔다 해도 안 따라가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고.


내 얼굴에 서울에서 혼자 온 여행객이라고 쓰여있는 건지, 부산이라는 도시가 원래 모르는 여자에게 선뜻 다가가게 하는 어떤 마법을 부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난 5월에 부산에 왔을 때도 모르는 아저씨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겠다며 길에 있는 나를 붙잡고 긴 시간 이야기를 해주기도 했고. 혼자 잘 나다니지 않는 나로서는, 드물게 혼자 나설 때마다 생기는 이런 상황들이 무척 신기하고 신선하고 조금은 무섭다. 오늘 일어나니 뽀시래기와 선량남 모두에게 연락이 와 있었다. 늦잠을 잤기도 하고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그 둘 연락에 한참이나 답하지 않았다.


내 구독자 중에는 내가 답장을 하지 않는데도 하루에 몇 통씩, 지금까지 한 열 통쯤 일방적으로 찬양과 존경을 전하며 만남을 간절히 원하시는 작가님이 있는데, 오늘 온 메일에서는 혹시 나를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기대로 부산행을 결심했다고 한다. 이건 좀 무모한 정도가 아닌가 싶다. 이 메일에도 답하지 않았다.


오늘 온 또 다른 구독자분의 메일은 자기가 내 이상형에는 부합하지 않는 것 같지만 내가 결혼하기 전까지 세컨드가 되거나 집과 차를 선물하고 노예가 되어 내 곁에 남는 건 어떨까 상상해 봤다고 하신다. 그 두 분은 현실의 나를 본 적도 없으면서 고작 내 글만 보고 저렇게까지 깊은 마음을 품고 극단적 표현까지 전해주시는 게 나로선 참 신기하다. 남자들이란 어떤 존재인 걸까.


내가 철가루들에게 묻고 싶은 건, 혹시라도 내가 마음을 나쁘게 먹고 그들의 제안에 덥석 응해서, 가진 모든 걸 다 빼앗고 탈탈 털어버리는 꽃뱀짓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는 건지 참 걱정이 된다. 세상엔 남자의 재산과 마음과 영혼을 빼앗아 단물만 빨아먹은 다음 껍데기는 갈기갈기 찢고 버리는 나쁜 여자들도 많다. 내가 답장을 안 하고 안 만나는 게 오히려 그들의 인생을 위해주는 측면이 있다는 점을 알아주셨으면 한다.


한편 저 멀리 인천에는 내가 부산 집필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 나를 만나러 올 테니 자기와 등산을 가자고 메시지를 보내놓고 기다리는 철가루도 한 명 있다. 그 메시지도 며칠 전에 왔는데 아직 대답하지 않고 있다. 나는 그렇게까지 치명적으로 예쁘거나 대단한 사람이 아닌데, 왜 이렇게 나를 보고싶어 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자고 조르는 철가루들에게 에워쌓이게 되었는지 이해가 잘 안 된다. 너무 여럿이 재촉하고 압박하면 왜인지 나는 더욱 혼자 있고 싶고, 꼭꼭 숨어버리고 싶어진다. 머리카락도 안 보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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