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의 확산 이후 전염병의 패턴은 반복되고 있습니다.
13세기, 십자군 전쟁이 끝나고 백년전쟁이 시작되면서 세계의 질서는 변했고, 변화는 곧 일상이 됩니다. 사람들은 정보를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고, 교역은 상시적인 구조가 되었습니다. 도시는 다시 활성화되었고, 교역의 확대는 서유럽에서 화폐를 다시 중심으로 끌어올립니다. 그 결과 에너지와 물질의 순환은 빠르게 확장되기 시작합니다. 급격히 확장된 에너지와 물질의 순환은, 역사적으로 반복되는 하나의 패턴을 보입니다. 바로 전염병의 창궐입니다.
14세기에 이르러 중세 유럽 전역에는 흑사병이 퍼지기 시작합니다. 흑사병의 기원에 대해서는 몽골의 지배하에 있던 중앙아시아에서 시작되었다는 견해가 가장 유력한데요. 이 시기, 사막 건너편에 위치한 중국 역시 몽골 제국에 의해 강력한 정보의 확산과 혼재가 이루어진 상태였습니다. 즉, 이 시점의 유라시아 대륙 전체에서는 전례 없는 규모의 정보 확산과 혼합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죠. 그중에서도 실크로드가 관통하던 중앙아시아는 정보의 밀도 변화가 가장 극단적으로 발생하던 지역이었습니다.
사실상 이 시점부터 유라시아 대륙의 정보 순환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봐도 무리가 없어 보입니다. 이러한 정보의 본격적인 순환이, 생명 정보의 한 형태인 전염병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흑사병의 창궐로 인해 최소 1억 명에 달하는 세계 인구가 소멸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세계 인구가 약 4억 5천만 명 수준이었음을 고려하면, 전 세계 인구의 약 30%가 사망한 셈입니다. 문명과 국가가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에너지가 인간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문명이 보유하던 에너지의 상당량이 사용조차 되지 못한 채 소실된 것이지요.
대규모 정보 확산 이후 전염병이 발생하는 현상은 14세기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닙니다. 과거 마케도니아가 제국을 이룬 시기에도 대규모 전염병의 유행을 시사하는 사료들이 존재하며, 서로마 제국 역시 최대 영토를 달성한 이후 안토니우스 역병을 겪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동로마 제국이 지중해 일대를 수복하던 시기에도 유사한 전염병 기록이 확인됩니다. 이러한 패턴이 중세에서도 그대로 이어진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눈여겨봐야 할 핵심은, 전염병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배경에 항상 정보의 확산과 혼합이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생명은 본디 외부 정보, 즉 바이러스나 세균과 같은 외부 존재가 내부로 유입되는 것을 막기 위한 면역 시스템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질병이 확산되었다는 것은, 대규모로 갖춰져 있던 기존의 면역 시스템이 해킹을 막지 못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는 규모화된 인간 면역 체계에, 기존에 학습되지 않은 미학습 코드가 침입한 사건으로 보는 것이 합당해보입니다. 인간 사회에서 다양한 정보가 혼재되며 새로운 문화가 탄생하듯, 생물학적 영역에서도 다양한 세균과 바이러스의 유전 정보가 혼합되며 새로운 생명 정보가 만들어진 것이죠.
이 미학습 코드는 바이러스의 형태로는 인간 RNA의 코돈 해석 과정에 직접 개입하고, 세균의 형태로는 그 해석 환경과 신호 체계를 붕괴시킵니다. 그 결과 신체 내부의 정보처리장치는 오작동을 일으키게 되고, 문명이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에너지원은 심각한 위험에 빠지게 되는 것이죠. 따라서 새롭고 쉽게 확산되는 질병이라는 정보가 퍼질수록, 문명의 핵심 에너지는 빠르게 고갈되는 것입니다. 전염병 발생에 일정한 패턴이 존재하듯, 전염병 이후에도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패턴이 존재합니다.
다수의 죽음으로 토지 관리와 소유에 공백이 발생하고, 인간의 급여나 하사품이 증가하는 등의 현상이 자주 관찰된다는 점입니다. 이 패턴의 특징은 명확합니다. 땅이든, 화폐든, 전리품이든, 인간이 소유하던 모든 형태의 에너지는 일시적으로 점유의 공백이 발생하며, 점유 밀도가 낮아지고 재편된다는 것입니다. 이 변화는 문명 내부의 에너지 분포에 큰 변화를 일으키고, 기존의 세력 구조를 뒤흔들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염병의 창궐은 문명과 인간에게는 치명적인 위협이지만, 동시에 생존자에게는 새로운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정보의 대규모 확산과 팽창, 그리고 혼재는 생물학적 정보 영역에서도 동일하게 발생하는 현상입니다. 이 현상이 문명 에너지에 직접적인 손상을 가할 때, 우리는 그것을 전염병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이 패턴은 단순한 재난으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주의 깊게 관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흑사병 이후에도 정보의 확산과 혼재는 멈추지 않았고, 오히려 그 규모는 더욱 커졌습니다. 그와 함께 문명이 통제할 수 있는 에너지의 범위 역시 지속적으로 확장되어 왔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