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행복한 가정을 꿈꾸는 극히 정상적인 부부입니다. 8명의 아이들이 북적대는 4층짜리 저택에 사는 것을 꿈꾸죠. 오롯이 자신들의 능력만으로 일구어내기 벅찬 감도 있었지만 어쨌든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휴일이면 친지들이 모여 행복한 모임의 구심점이 되는 가정을 만들어 냅니다. 다섯째 아이 '벤'이 태어나기 전의 이야기입니다.
물론 벤이 태어나기 전에도 어려움은 있었습니다. 네 아이를 동시에 돌본다는 것은 대단한 시간과 체력, 그리고 인내심을 필요로 하는 일이거든요. 그런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시아버지의 재력과 친정엄마의 희생적 노동력으로 어쨌든 해결해 나갑니다.
하지만 벤의 출생 이후 상황은 변합니다. 아니, 임신 중에도 벤이 어떤 아이일 것이라는 암시는 여러 부분에서 주어집니다. 임신기간 내내 해리엇은 태아의 태동을 감동이 아닌 폭력에 가까운 고통으로 인지하고 시달립니다. 아이가 태어난 후에는 아이의 식탐을 감당해내지 못해 모유수유도 포기합니다. 생긴 모습 또한 미추의 경계를 벗어나 두려움마저 느끼게 하는 원시적인 외모에서 우리와는 다른 범주의 사람이라는 느낌을 갖게 합니다. 마음을 읽을 수 없는 분절적 관계 맺음과 억센 육체의 힘 역시 가족들을 불편하게 합니다. 하지만 가장 큰 두려움은 벤이 가지고 있을 것이라 짐작되는 폭력성입니다. 어느 날 아침, 부엌 바닥에 죽어있는 고양이를 발견한 순간, 가족들은 그 전날까지 고양이를 차가운 눈으로 관찰하던 벤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그날 밤부터 아이들은 자기 방문을 잠그고 잡니다. 물론 어느 누구도 벤이 그 고양이를 죽였다고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또한 작품에서도 언급되지도 않고요. 손님이 데려온 애완견이 죽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딱히 벤이 개를 죽였다는 증거는 없지만 모두가 벤을 두려운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이때 시어머니인 몰리는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벤을 시설로 보내버립니다. 죄책감과 책임감 사이에서 괴로워하던 해리엇은 데이비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시설에서 벤을 데려오고야 맙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가족의 붕괴는 급속도로 빨라집니다. 벤의 존재 자체를 불편해했던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말죠. 큰아들 루크는 경제적으로 넉넉한 할아버지 댁으로, 둘째 헬렌은 학문과 명예를 중시하는 할머니 댁으로, 셋째 제인은 유복하지도 않고 지적이지도 않지만 사랑이 넘치는 외할머니 도로시집으로 가버립니다. 남아 있는 넷째 폴만이 방치됩니다. 벤에게 지친 엄마 해리엇의 무관심과 가정의 경제력 회복을 위해 밖으로만 도는 아빠 데이비드, 그리고 두려우면서도 경멸하는 벤 사이에서 폴은 서서히 정신적으로 무너져갑니다.
가장 마음이 아팠던 부분은 성장과정에서 그토록 방치되었던 폴이 드러내는 문제에 대해, 어느 순간 벤과의 위치가 뒤바뀌는 순간입니다.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정상 범주가 아니라고 생각해왔던 벤이 그저 다른 범주에 속하는 아이였을 뿐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폴은 고민의 여지없는 비정상이라고 여기게 됩니다.
하지만 그 결론을 내리기까지 해리엇의 행적을 살펴보자면 그녀는 의사로부터 벤이 비정상에 속한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많은 애를 써왔습니다. 여러 의사들을 만나 벤이 비정상이라는 판정을 내려주기 원하지만 의사들은 벤이 그저 남들과 다를 뿐 정상 범주에 속한다고 결론짓습니다. 벤에 대한 처치를 원하는 해리엇은 아무런 처방도 해주지 않는 의사에게 그럼 벤이 아닌 자신을 처방해 달라고 합니다.
의사는 처방전을 써주었다. 해리엇은 종이쪽지를 받았다. 그녀는 길리 박사에게 감사를 표하고 작별 인사를 했다. 그녀는 문가로 가서 뒤를 돌아보았다. 의사의 얼굴에서 그녀는 자신이 기대했던 것을 보았다. 그 여인이 느끼고 있는 것이 투영된, 어둡고 고정된 시선이었다. 그것은 인간 한계를 넘어서는 것에 대한 정상인의 거부, 이질성에 대한 공포, 또한 벤을 낳은 해리엇에 대한 공포였다.
의사는 정상이라고 결론 지었지만 해리엇은 그 정상이라는 것이 의학적 경계였을 뿐, 일반적 상식에서는 아니라는 암시를 받습니다.
이 책 '다섯째 아이'는 저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었습니다. 대부분은 이 책을 읽고 아이와 가정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셨다던데 사실 저는 개인적 경험이 떠올랐습니다. 단 한 명의 개인이 전체 집단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를 일 년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영민하고 적극적인 아이들이 모인 집단에 단 한 명의 부적응자가 미치는 영향의 부정적 결과를 장기간에 걸쳐 확인했습니다. 한 아이가 주는 영향력은 겨울 찬바람 부는 마른 낙엽 틈에서 시작된 산불 같더군요. 다양한 이유와 원인들이 뒤섞이고 우연과 필연이 혼합되어 난 결과겠지만 벤 하나로 해리엇의 가정이 망가지는 걸 바라보는 것과 비슷한 경험이었습니다. 하나의 원인이 만들어낸 결과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 아이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왜 벤과 같은 아이를 가지게 되었을까요?
그녀는 데이비드에게 말하였다.
"우린 벌 받는 거야. 그뿐이야"
"무엇 때문에?"
그녀의 목소리에 그가 증오하는 톤이 있었기 때문에 방어적으로 그가 물었다.
"잘난 척했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해야겠다고 결정했기 때문에. 행복해서"
절대 논리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은 이유입니다. 그들이 겪는 불행의 원인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이 세상의 모든 불행의 원인을 정답 찾듯 규명할 수 없듯이 이들이 겪는 불행의 원인 역시 규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삶의 불행이 닥치면 더욱 받아들이기 힘든 게 아닐까요? 그 원인을 내 안에서도 밖에서도 찾을 수 없기에 인정할 수 없는 거죠. 물론 해리엇과 데이비드가 했던 선택과 결정들 중에는 아쉬운 것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판단이 이 정도의 불행한 결과를 가져오게 할 만큼 결정적이었나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책은 다양한 주제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던져줍니다. 벤이 보여주는 행동 양식과 그에 대한 주변의 반응으로 정상의 경계란 어디까지인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또한 벤을 시설에서 데려오는 해리엇의 결정에서 정상의 다수를 위해 비정상의 소수를 포기하는 게 맞는지 의문을 갖게 합니다. - 사실 이 질문은 독서 모임의 회원들 모두에게 했으나 팽팽한 5:5의 의견 차이를 보임으로서 단순한 선택의 문제 일 수 있겠다는 성급할지도 모르는 결론을 가져오게 했습니다. -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위한 조건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됐습니다. 안나 까레니나에서 언급했듯 행복한 가정의 모든 조건들을 충족시키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지 모르겠네요. 데이비드의 친부모와 양부모들이 보여주는 계층 사회의 단면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 다양한 주제를 담고 있는 책이기에 '다섯째 아이'는 더욱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저에겐 개인과 조직, 즉 벤과 가정 둘 중 어느 것을 선택해야만 하는 순간이 왔을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들어 보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특히 개인적 경험의 순간에서 해리엇처럼 개인을 놓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직 전체를 망친 것은 아닌가 하는 후회 섞인 기억을 갖고 있기에 좀 더 특별한 책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