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를 끊는다는 건 감정을 지우는 일일까
“차단까지 할 건 아니잖아.”
그 말은 맞는 듯 들리지만, 정작 내 마음은 이미 한계에 가까워져 있다. 읽지 않으면 불안하고, 읽고 나면 하루가 무너진다. 창을 닫았다 열었다, 짧은 답장을 쓰다 지우기를 반복한다. 손가락은 ‘차단’ 위에서 오래 머문다.
‘차단’이 주는 과격한 환상
‘차단’이라는 단어는 종종 사형선고처럼 들린다. 끝, 절연, 삭제.
하지만 실제로 그것은 경계선에 가깝다. 문을 잠그고 커튼을 치는 일.
“여기까지가 나의 가장자리”라는 표지.
그러나 성숙함은 무한 인내가 아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감정의 총량을 알고, 넘치기 전에 멈추는 감각이다.
반복되는 야간 연락, 간헐적 다정으로 묶어두는 신호, 농담과 설득과 조롱이 뒤섞인 말들.
이런 상황에서 ‘계속 대화로 풀라’는 권유는 때때로 상처를 연장하는 방식이 된다.
‘설명 없는 단절’이 남기는 질문
“왜?”, “언제부터?”, “내가 뭘 잘못했지?”
설명은 친절하다. 가능하다면 좋다.
“당분간 연락을 받지 않겠다”, “밤 10시 이후 메시지는 어렵다”
이런 짧고 분명한 문장은 서로를 존중한다.
하지만 안전이 위태롭다면, 설명은 또 하나의 구실이 된다. 그럴 땐 침묵과 단절이 오히려 윤리다.
안전 앞에서 미안함은 뒤로 간다.
디지털 침묵과 반복 침해가 만드는 피로
읽었는지, 언제 읽었는지, 입력 중인지까지 보이는 시대.
말하지 않아도 해석은 증식한다.
“알면서 무시했구나.”, “일부러 그러는 거구나.”
이 추측의 소음 속에서 마음은 더 쉽게 닳아간다.
차단은 그 소음을 끊는 기술이자 상처를 강화하는 회로를 끊는 선택이다.
차단을 망설이게 하는 죄책감
“관계를 끊는 나는 나쁜 사람 아닐까.”
미안함은 감수성의 증거지만, 안전을 대신하진 못한다.
나는 타인의 외로움을 치료할 책임이 없다. 책임은 상호성에서만 생기고, 돌봄은 동의 위에서만 유효하다.
‘착함’을 윤리로 오해하면, 경계는 늘 나중으로 밀린다.
가까워도 선이 필요하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경계가 더 정확해야 한다.
연인이든 친구든, 관계를 지켜주는 건 거리두기가 아니라 경계다.
그 경계는 단절을 위한 장벽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감정을 위한 안전장치다.
우리가 서로를 오래 좋아하기 위해선, 가까워지되, 지나치지 않아야 한다.
내가 차단당했다면
다른 채널로 우회하지 않는다. 공동지인으로 소식을 돌리지 않는다. 그건 관심이 아니라 2차 침해다.
상대가 원할 때, 한 번, 짧고, 명확하게 사과하고 회신을 요구하지 않는다.
경계는 내가 아닌, 상대가 정한 좌표에서 그려진다.
거절은 인격의 전면 부정이 아니다.
‘차단’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어야 한다
나는 왜 그토록 오래 버텼나?
나의 하루와 주의력, 언어는 누구의 것이었나?
관계를 붙드는 유일한 이유가 연민과 미안함뿐이라면, 이제 나의 안전을 먼저 설계할 때다.
문을 닫는 것은 실패가 아니라, 다른 문을 안전하게 열기 위한 준비다.
나는 너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나를 사랑하기 위해 이 문을 닫는다.
언젠가 더 환하고 안전한 문가에서, 우리의 말이 다시 사람답게 닿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