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기 오른 밤
흐릿한 달빛 아래
아직 시들지 않은 꿈들이 춤춘다
한 잔
사색은 술잔 속에 풀어져 회오리처럼 고요한 방을 맴돈다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처럼 어떤 공백이 가슴을 스친다
다시 한 잔
술의 따뜻함이 추억의 차가움을 잊게 한다
세상의 소음이 멀리서 들려온다
오묘한 감각과 순간의 해방을 느낀다
마지막 한 잔
골목의 쓸쓸함과 별의 미소에
나는 지금 취해 있다
한때, 혼술을 몹시 즐겼습니다. 불이 꺼진 방, 적막한 공간 속에서 아무의 방해도 받지 않은 채, 술기운에 몸을 맡기는 일이 주는 해방감이 좋았습니다. 다른 이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된다는 자유로움, 그 속에서 스스로에게 몰입하는 순간들이 주는 은밀한 만족.
처음에는 가벼운 기분으로 잔을 기울이지만, 몇 모금이 지나면 금세 몽롱해지고 내면의 결이 흐트러지기 시작합니다. 억눌러왔던 감정들이 하나둘 스며 나오고, 무심코 가라앉혀 두었던 욕망과 공허함이 조용히 몸을 감쌉니다. 꿈을 향한 아쉬움과 이루지 못한 것들에 대한 회한이 알코올을 매개로 다시 떠오르는 것입니다. 이 글은 바로 그러한 취기와 사색이 맞물린 경계에서 탄생했습니다.
술 한 잔이 천천히 목을 타고 흐를 때마다, 평소 깊숙이 갈무리해 두었던 생각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머릿속을 휘젓습니다. 하루의 피로를 벗어던진 후 찾아오는 무장 해제된 시간, 그 틈을 비집고 기억이 스며듭니다. 오랜 인연이 남긴 공백, 애써 묻어두었던 감정의 흔적들이 처음에는 작은 점으로 떠오르다가 점차 커다란 원이 되어 나를 휘감습니다. 그래서 한 잔을 더 기울입니다. 마치 잊고 싶으면서도 잊고 싶지 않은 모순된 심정처럼, 한 잔이 쌓일수록 감각이 더욱 예민해지고 기억은 더욱 선명해집니다.
술에 취하면 바깥세상의 소음이 유난히 날카롭게 들릴 때도 있고, 반대로 모든 것이 무겁게 가라앉아 기묘한 정적 속에 갇히는 듯한 순간도 찾아옵니다. 어떤 때에는 무감각이 되고, 또 어떤 때에는 지나치게 예민해지는 상태. 차츰 몸을 감싸는 이 이질적인 감각은 마치 현실과 비현실 사이를 오가는 듯한 기분을 자아냅니다. 손끝이 느슨해지고, 한기가 도는 유리잔을 쥐는 감촉마저 이질적으로 다가옵니다. 술기운이 온몸을 휘감으며, 무언가를 벗어 던진 듯한 해방감을 선사합니다. 마치 본연의 내가 다시 태어나려는 순간처럼.
마지막 한 잔을 손에 들고 창가로 다가섭니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 저 멀리 골목길이 길게 이어집니다. 저 길을 따라 걸으면 어디론가 닿을 것 같은데, 나는 그 끝을 알지 못한 채 발걸음을 내딛지도 못한 채 머물러 있습니다. 시선을 들어 하늘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방충망이 시야를 가로막아 세상은 네모난 조각들로 잘려 있습니다. 비정형적인 풍경이 오히려 낯설게 다가오고, 그 기묘한 감각에 다시 한 번 취해 갑니다. 마치 현실과 꿈의 경계를 허물듯이.
술을 마시는 일이 단순히 취하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한 감정을 탐색하는 의식처럼 느껴집니다. 스스로를 해체하고 다시 조립하는 과정, 취기를 통해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시간. 그 순간만큼은 나 자신에게 솔직해질 수 있는 몇 안 되는 순간일지도 모릅니다.
윤태건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