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자리에는 이유가 없더군요.

환상의 빛_#2016년 7월

by 토토

당신은 무엇을 봤던 건가요. 당신을 이끈 것은 무엇이었던가요. 유이치가 젖도 떼기 전 당신은 구이세와 다이모쓰 사이 기차선로를 하염없이 걷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세상을, 그리고 제 곁을 떠났다는 사실은 알고 있나요. 아무런 연유 없이 당신은 기차의 경적소리나 급정거 소리에도 전혀 뒤를 돌아보지 않았더랬죠.


이유가 없다는 것. 아니 이유를 알 수 없다는 이유로 저는 그저 불 꺼진 방 안에 앉아 있는 일 밖엔 할 수 없었습니다. 어둔 밤, 해가 들지 않는 방에 앉아 덜컹덜컹 지나가는 기차 소리를 듣다가도, 번쩍 정신이 들면, 당신의 자전거를 타고 이리저리 마을을 떠돌았습니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 눈을 돌리면 당신이 세상을 등진 선로 곁이더군요.

이제 저는 유이치와 함께 아마가사키를 떠나 오쿠노토의 소소기라는 해변 마을로 떠납니다. 당신이 떠난 지 몇 해만 일까요. 아랫집 아주머니가 중매를 서주셨습니다. 소소기에 저와 함께 살아갈 남자의 이름은 세키구치 다미오입니다. 도모코란 예쁜 딸이 있는데, 유이치의 좋은 누나가 되어 줄 것 같습니다.


당신이 세상을 떠난 이후, 저는 당신이 세상을 떠난 이유를 바느질하듯 생각해보기도 하고, 당신이 떠난 후 작은 가슴에 커다랗게 뚫린 구멍을 들여다보기도 하였습니다. 이유를 알 수 없기에 빈자리는 시간이 가도 메워지지 않았습니다. 이유를 알더라도 당신이 돌아올 수 없다는 점에서 그 이유가 그리 중요할까 싶다가도, 이곳, 바람이 세찬 소소기 마을의 바람이 구멍 난 가슴을 지나갈 때면 저는 당신이 기차가 지나는 선로를 걷는 모습을 지울 수가 없게 됩니다.

하지만 이쿠짱, 유이치는 이곳이 좋은 가봐요. 난생처음 보는 시아버님 무릎에 앉아 티브이를 보고, 어느 날은 누나와 함께 바닷가의 언덕과 논두렁, 마을 여기저기를 뛰놀며 무럭무럭 커나갑니다. 아 그렇지요. 저는 제 딸이 된 도모코의 머리칼을 잘라주기도 하였답니다. 도모코는 중학교에 들어가면 머리를 기른다고 합니다. 저는 훨씬 이뻐 보일 것이라고 말해줬고요. 다미오씨와 유이치는 목욕을 함께 합니다. 아마도 당신이 있었다면. 유이치는 목욕을, 당신과 했을지도 모르겠군요.


20년도 넘은 일이군요. 당신도 기억하는 이야기지만, 제 할머니는 고향에 가겠다며 집을 나섰다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할머니가 사라졌던 날, 당신은 할머니 대신 나타난 것처럼 내게 모습을 드러냈었죠. 그때 전 왜 좀 더 확실히 붙잡지 않았을까요. 할머니도 사라지고, 당신도 사라졌습니다. 무엇이 할머니와 당신을 이끌었나요. 저는 아직, 사실은 지금도 알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기에 구멍 난 가슴에 차디찬 소소기의 바람이 드나듭니다.

얼마 전 저는 할머니와 당신에 이어 또 한 사람을 잃을 뻔 하였습니다. 시아버님과 친구 뻘인 할머니 토메노씨가 바다에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았거든요. 새벽녘 저와 인사를 하고 떠난 토메노씨가 바다로 나간 날은 비가 내리고, 파도가 거셌습니다. 마루에 앉아 거센 바람에 창문이 덜컹이는 소리를 얌전히 들으며, 토메노씨가 돌아오지 않을까 봐 겁이 났습니다. 아니, 사실은 너무나 무서웠습니다. 뇌일혈로 거동이 불편하진 시아버님은 제 마음을 읽으셨는지, 토메노씨가 불사신이라고 하였습니다. 맹세코 돌아온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요. 토메노씨는 돌아왔습니다. 할머니가 떠나고, 당신도 떠나갔지만, 토메노씨는 돌아오더군요. 안 죽고 돌아와서 미안하다는 말을 툭 던지시고는 제게 게 몇마리를 잡아다 주셨습니다. 마음이 서툰 저는 뭐라 드릴 말이 없었지만, 얌전히 게를 손질하며 저민 맘을 다독였습니다. 토메노씨는 어느 날 제게 말하셨어요. 잊기가 힘들 거라고, 당신이 죽은 것이 언제였냐고. 토메노씨는 유이치가 당신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며 다행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럴까요. 그 편이 나을 것 같나요?


이쿠짱. 어느 날 말이에요. 저는 마치 홀린 듯 소소기의 해변을 걸었답니다. 무엇이 저를 걷게 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어떤 마음에선가 낯선 곳을 걸어 낯선 곳에 이르게 되었답니다. 저 멀리 어떤 장례의 행렬이 보였습니다. 망자를 기리는 방울소리가 딸랑딸랑 들리고, 검은 옷을 입은 이들이 흰 눈발이 내리는 길을 지났습니다. 저는 그 행렬을 따라 바닷바람이 거센 갯바위를 따랐습니다.

다미오씨가 저를 발견한 곳은 장례를 치르고 화장을 하는 해변이었습니다. 다미오씨는 사라진 저를 타박하지 않았습니다. 말없이 제 곁을 지키고 선 다미오씨에게 물었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왜 당신이 철길을 혼자 걷고 있었는지를. 다미오씨도 당신이 왜 그랬는지는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오히려 시아버님이 하신 말씀을 전해줬습니다. 시아버님은 바다가 저를 부른다고 하셨답니다. 시아버님은 예전에 배를 탔는데, 혼자 바다에 있을 때면 바다 깊은 곳에 빛이 보인다고 하였습니다. 그 빛이 반짝거리면서 저를 유혹하는 것 같다고 했더랍니다. 다미오씨는 제가 이 바다를 찾은 것처럼, 누구라도 그런 경험이 있는 것 아니겠냐고 하였습니다. 당신이 철길을 따라 걸어간 것처럼 말이에요.


저는 빛을 보진 못하였어요. 이쿠짱. 당신은 어떤 빛을 보고 선로 위를 하염없이 걸었던가요? 당신이 준 방울이 딸랑딸랑 소리를 내면, 전 이내 당신이 그리워집니다. 가슴이 아파오기 시작합니다. 그립다는 건 그런거니까. 그립다는 건.


유이치와 도모코가 무럭무럭 자라납니다.


소소기에서 유미코가.

*영화 '환상의 빛'은 1995년작으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처녀작입니다. 미야모토 테루의 중편 소설을 원작으로 합니다. 영화 특성상 주인공 '유미코(에스미 마키코粉)'가 세상을 등진 남편 '이쿠오(아사노 타다노부粉)'에게 말하는 형식으로 상상해 적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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