젓가락질 하는 선우의 가늘어진 팔이 보였다. 반팔 소맷단 언저리에 불주사 자국 위에는 초록색 별 모양 문신이 있었다. 그리고 영문 필기체로 뭐라고 쓰여있었는데, 내가 물으니 20대 때 새긴거라고 말할 뿐이었다.
글은 쓰냐?
미주는 선우가 자신의 말을 허투루 들은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저번에 만났을 때 미주는 자신이 백수가 되어 소설을 쓰고 있다고 했었다. 가족에 대한 소설을.
선우는 마포에 살 때 불법 도박장을 드나들었다. 진숙이 해준 이야기다. 노름빚이 쌓여 야반도주한거라고 했다. 작년에 선우가 돌아왔을 때, 어디 가서 뒤지지. 뒤질 때 되니까 돌아와. 라고 진숙이 종잇장 같은 선우의 등짝에 데고 소리쳤을 때, 선우는 악다구니 쓰는 사람을 처음 보기라도 하듯, 눈을 꿈뻑거리며 이 여자가 자신이 알던 순종적 여자가 맞나 싶은 얼굴로 진숙을 바라봤다. 버들 풀 같던 진숙의 눈썹은 독수리 날개 뼈처럼 휘어져 있었고, 눈썹 칼로 얄쌍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미주는 진숙의 다듬어지지 않은 버들눈썹을 떠올렸다.
인천 앞바다는 간척사업이 한창이었다. 미주는 일곱 살이었고, 동이 틀 때까지 부둣가에서 진숙과 간척사업 현수막이 바람에 휘날리는 걸 보며 선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진숙은 울지도 보채지도 않고 앉아 있는, 애비 잃은 미주가 가엾어 눈물도 안 났다고 말했다. 미주는 해가 뜨고 나서야 실감했다. 만약에 아빠가 안 돌아오면 어떻게 하지라고 생각했다. 그날부터 미주는 항상 무슨 일을 계획할 때면 최악의 상황1, 최악의 상황2, 최악의 상황3까지 생각해 놓고 실행에 옮겼다. 인생이 언제고 뒤통수를 후려갈길지도 모를 일이니까. 아무튼 선우는 미주와 진숙 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30년 동안.
30년 동안 연락 한 번 안 한거야?
그렇다니까. 한 번도. 진숙이 말했다.
30년 동안 연락을 한 번도 안 한거야?
두세 번 했지. 선우가 말했다.
누구 말이 맞는지 미주는 끝내 모르고 살아갔다. 확실한 건 자신이 아빠를 30년 만에 만났다는 사실뿐이었다. 선우는 담배를 태우지 말라는 의사 말에 경륜과 연륜을 다해 호로새끼라며 가뿐히 무시하는 칠십 노인이 되어 돌아왔다. 선우는 돌아오자마자 큰 수술을 받았다. 수술비를 계산하고 올라온 딸에게 영수증을 자세히 살피라고 말했다. 중복계산 된 것 없는지 따져보라고.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요즘 누가 그런 식으로 처리하냐고 미주가 말하자, 선우는 시대를 막론하고 사기꾼들이 등치는 세상이라고 말했다. 사기꾼은 당신이면서.
이 앞에 여관방 있나 보고 올게.
선우가 30년 전 그날 밤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분명히 올게.라고 말했던 것 같다. 진숙은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선우의 목소리와 표정까지 그대로 흉내 냈다. 진숙은 그 순간을 미주 앞에서건 자신의 여동생들 앞에서건 30년 동안 흉내 내고 또 흉내 냈다. 그리고 꼭 이렇게 덧붙였다. 결혼할 때도 고졸이라며 사기를 치더니, 국졸이더라고. 인생 자체가 사기야.
할아버지가 의사라는 건 진짜래? 하고 미주가 물으면 응. 그것도 아부지가, 네 외할아버지가 결혼 전에 다 알아봤지. 그건 진짜야. 그러고 보면 그 남자도 불쌍해. 부모 사랑 한번 못 받고, 고아나 다름없이 컸잖아. 그나마 그 남자 할머니가 아사 직전에 데려가 살았다더라. 불쌍한 인간. 이라고 말했다.
그러다 정신이 든 사람처럼 갑자기 불쌍하긴 뭐가 불쌍해. 그런 남자 만난 내 팔자가 불쌍하지. 나쁜 놈. 이라고 말했다.
진숙이 그 남자 선우에 대해 말할때면 감정은 급강하하는 롤러코스터 위에 있었다. 미주가 별로 수긍하지 않고 그저 드라마 한편을 보듯 널뛰는 진숙을 지켜볼 때면 너도 기억나지? 하며 항상 미주의 동조를 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