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글자를 담아낼 때면, 모든 소리는 없는 것이 된다. 이미 모든 것이 고요해졌다. 하지만 머릿속은 사뭇 소란스럽다. 철썩철썩 생각의 파도가 마음의 바위를 깎아내고, 우리는 그러한 풍경으로 가득한 바닷속을 항해하듯 책을 읽는다.
오늘의 하루는 한 페이지의 책을 읽는 것으로 시작한다. 정갈하고 포근한 느낌의 글씨들이 하얀 종이에 빼곡하게 들어서 있는 모습과 사랑에 빠진 지도 오래다. 한 때는 책이 주는 '느낌'만으로 충분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무엇보다도 그 책이 품고 있는 글과 소통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미지근한 독서보다는 조금 더 깊이 있고 뜨거운 독서가 좋다. 같은 줄을 몇 번씩 읽으면서 그 문장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열정이 좋고, 읽었던 내용을 간직이라도 하듯 어딘가에 글귀를 휘갈겨 써 놓는 조그마한 습관 같은 것들도 좋다.
독서한다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내려놓고 오히려 더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아무 매개체 없이 그냥 생각할 때에는 그 생각의 중심이 지나치게 나 자신일 때가 많다. 그래서 생각의 결론은 다소 이기적이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생각할 때는 생각의 중심이 꼭 나여야만 할 필요는 없다. 책의 화자가 될 수도 있고, 소설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 그 과정에서 나를 우선시하지 않은 다른 어떤 가치들을 읽어내고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게 된다. 이기적이지 않은 생각의 과정, 내가 생각하는 독서의 정의이다.
독서는 나를 여행하게 하고 모험하게 한다. 책을 읽고 싶다,라는 찰나의 생각들은 나를 여행길에 오르게 한다. 실제로 여행을 떠나기 위해서는 이것저것 짐을 싸지만, 책을 읽을 때는 별다른 준비가 필요하지 않다. 책을 읽고 싶다는 마음과 읽을 책만 있다면 시간과 장소에 상관없이 독서를 시작할 수 있다. 만약 독서가 많은 노력과 수고스러움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면 책 읽기를 시작하기가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책 읽기는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떠날 수 있는 짧은 여행과 같다.
곧 가을이 오고, 좀 더 높아진 하늘은 우리에게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을 선사한다. 매일매일 '오늘의 책'을 경험하는 것은 하루를 그 이전보다 조금 더 낫게 만드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읽을 수 있음에 감사, 그리고 생각할 수 있음에 한 번 더 감사할 수 있는 날이 될 것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