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지지 않는 꽃무리를 보았다

얕은 산책과 생각들

by 몌짱이



우리는 초봄을 지나 늦봄으로 가기 위해 손을 잡았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놀라 서로의 눈을 보았을 때 나는 그 눈 속에서 무너지지 않는 꽃무리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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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곧 걷는다. 넘쳐흐르는 생각을 잠시나마 잠글 수 있는 방법이다. 그렇게 흐르는데도 그 생각에 말끔히 손을 씻어낼 수가 없어서 더욱 빠르게 걷는다. 부산의 거리는 언젠가 매일 마주하던 서울의 거리와는 사뭇 다르다. 큼직큼직하게 들어선 건물들이 얼핏 비슷해 보이기는 하지만 두 도시는 서로 다른 때를 묻힌 채 지도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도시는 꽤나 아름답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절로 걷고 싶은 마음이 든다. 신호에 맞춰 유유히 흐르는 자동차의 무리를 보며 나도 따라 걷는다. 걸으면서 나는 그 속을 함께 걷는 사람들을 본다. 물론 누군가를 지나치게 유심히 살펴보다가 낭패를 볼 일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도시의 일부분으로써, 나는 사람들을 본다. 그리고 산책을 계속한다.



사람들로 가득 찬 도시에 살면서도 지나가는 사람들을 딱히 질려하지 않는 것은, 사람은 저마다 아름답다는 믿음 때문이다. 저마다의 감정들로 가득 찬 얼굴들을 스쳐 지나갈 때, 그러한 사람들 속에서 나도 하나의 존재임을 느끼며 안도할 때가 있다. 내가 그리 특별하지 않아서 좋고, 그러면서도 누군가에게는 아주 특별한 존재라는 것이 더욱 좋은 느낌을 받기도 한다. 물론 때로는 군중이 무섭기도 하고, 주말 밤 너무 많은 사람들과 마주치면 슬그머니 짜증이 밀려올 때도 있다. 하지만 사람은 결국 사람 속에서 사는 거라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닌 것만 같다. 대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 나는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남들은 성인이 되었다고 뭐든 하고 싶어 할 때, 나는 아무것도 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 당시만 해도 차갑게 느껴졌던 서울의 밤을 한동안 집에서 보냈다. 결국 몇 달만에 세상으로 걸어 나왔지만 말이다. 그 뒤로는 사람들 무리에서 쉴 새 없이 숨 쉬고 말하고 먹고 마셨다. 나도 역시 사람 없인 못 사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번엔 시선을 돌려 도시의 구석구석을 본다. 나의 발판이 되어 주는 거친 도로를 본다. 어느 상인이 쌓아 놓은 두툼한 나무 상자를 본다. 가게에 진열된 게으른 꽃들을 본다. 이렇게 무언가를 보면서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사치라는 마음이 든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그로 인해 떠오르는 것들을 한껏 느낄 수 있는 삶이 비로소 겸허한 삶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그렇기에 산책은 나에게 있어서 겸허해지는 하나의 방법이다. 물론 삶을 겸허하게 살아야 한다는 규칙 같은 건 없다. 오히려 마음가짐을 그와 반대로 먹고사는 사람들이 더 잘 살기도 한다. 처음에는 그것이 억울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라고 자라 어른이 되어가면서 그건 억울해서 될 일이 아니라 겸허하게 살 수 있음에 오히려 감사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건 결국 행복해지는 방법이자 현명하게 나를 감싸는 방법이었다.



그렇게 의식의 흐름에 가까운 생각들을 하면서 말 없는 산책을 계속한다. 문득, 이렇게 걷는 행위에 앞서 삶 자체가 무한하면서도 유한한 걸음의 일부가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든다. 이렇게 땅과 하늘과 사람들을 보면서 걷는, 정해지지 않았으면서도 무언가 정해진 게 있는 듯한 산책 말이다. 삶이 정말이지 그런 산책이라면, 그리고 걸음의 일부라면 삶은 아마도 꽤 살만한 것이 아닌가 싶다. 걸으면서 잠시 쉴 수도 있고, 힘이 나면 달릴 수도 있으니 말이다.



겨울이다. 해가 빨리 지고 날씨는 추웠다 포근했다를 반복한다. 단풍은 이미 지고 없고 나무가 앙상한 계절이다. 하지만 나는 어느 산책의 끝에서 무너지지 않는 한 무리의 꽃을 보았다. 그것은 모든 것을 등에 지고도 계속 걷는 사람만이 받을 수 있는 하나의 선물 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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