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찾은 서울, 특히 서울의 겨울 공기에선 씁쓸한 추억의 맛이 났다. 서울에 갈 때면, 한창 열차에서 졸다가도 한강을 건널 때면 왠지 꼭 창밖을 보곤 했다. 강물이 푸르스름하고 추워 보였다. 오랜만에 찾아온 서울이 반가웠다. 하지만 내게 있어 서울이란, 고향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십 년이 넘게 살았던 곳, 나의 이십 대를 치열함으로 푹 적신 곳, 그러나 좋아할 수도 미워할 수도 없는 곳이었다. 지금은 그날 이후로 또 몇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열차에서 내려 서울역에 오랜만에 발을 디딜 때의 감각이 생각난다. 하얀 입김만큼이나 눈물도 눈에 보일 것 같아 옆사람 몰래 눈을 비비던 그날 밤이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 나는 라테를 쏟았다.
당시에는 연인이었던 남편과 함께 경의선 숲길 근처 자주 가던 카페에 들렀다. 물론 우리 기준이긴 하지만, 그 카페의 대표 메뉴는 단연 아이스라테였다. 더운 여름이면 산책을 하다가 그 카페에 들러서 아이스라테를 마시곤 했었는데, 말하자면 '얼죽아'인 우리는 겨울에도 종종 아이스라테를 마셨기에 망설임 없이 메뉴를 정했다. 자주 올 때는 잘 몰랐었는데, 오랜만에 오니 자리가 다소 좁았다. 원형의 테이블에 두 사람이 앉으니 짐을 놓을 곳이 마땅찮았다. 입고 있던 코트를 놓을 데가 없어 무릎 위에 놓았다. 그리고는 남편이 커피를 테이블 위로 가져온 지 5분도 지나지 않아 정말이지 '완벽하게' 라테 한 잔을 엎어버렸다.
잔을 깨거나 쨍그랑 소리를 내진 않았지만 한 잔을 죄다 쏟은 바람에 근처 테이블에 있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는 듯했다(아마 실제로도 그랬을 것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온 몸이 얼음처럼 얼어붙어 얼른 치워야겠다는 생각을 실천으로 옮길 수가 없었다. 점원이 와서 나에게 냅킨을 줄 때까지 나는 한참을 얼어붙어 있었다. 냅킨 한 장을 손에 쥐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정리할 수 있었다. 점원이 바닥을 밀대로 깨끗이 밀어내는 것으로 무안한 순간이 일단 끝났지만, 나는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하고 한동안 멍하게 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 짧은 순간이 지나자 오히려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한참 깊은 잠에 빠져 아무것도 인식하지 못하다가 갑자기 생의 감각을 되찾은 듯했다. 그 감각은 부끄러움에서 깨달음으로, 깨달음에서 겸허함으로 옮겨가며 마음을 동동 두드렸다.
사실 커피 한 잔을 쏟은 것이 그리 큰 사건은 아니다. 하지만 삶 속에서 우리는 한 번씩 커피를 쏟는다. 실질적으로도 그렇고, 비유적으로도 그렇다. 밋밋하던 삶의 한가운데에서 이따금씩 우리는 크고 작은 사건을 만들어낸다. 원해서 그럴 때도 있지만 원하지 않는 실수나 사고가 생기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 맨 처음 느끼는 감정은 대부분 수치심이다. 하지만 그런 감정을 겪어내고 지나가다 보면 오히려 깨달음을 얻는 경우도 있다. 그 깨달음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우리를 이끌어주고, 나아가서는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않고 졸듯이 살아오던 안개 낀 삶에 알람을 울리는 역할도 한다. 즉, 실수라는 게, 커피 한 잔을 쏟는다는 게 그리 나쁜 일만은 아니란 얘기가 된다. 다소 당황스럽고, 만약 그 실수가 좀 큰 것이라면 죽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지언정 그것이 무조건 안 좋은 일이라고만 할 수는 없는 이유다.
삶 속에서 어떠한 '계기'가 생기는 것을 반가워하는 편이다. 그리고 그 계기가 만들어내는 '의미'를 소중하게 간직하기도 한다. 이런 의미를 찾는 일이 삶을 재미있게 만드는 행위이기도 하지만 사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이런 의미들이 꽤나 진지함을 요할 때도 있다. 나는 나에게 오는 하나하나의 계기들이 사실은 나에게 메시지를 주기 위해서 찾아오는 것임을 믿고 있다. 시간이 지난 지금도 남들 앞에서 커피를 쏟는 일만큼이나 부끄러운 일들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작은 메시지들은 나를 늘 깨어있게 한다. 그리고 그 메시지의 내용을 내가 만들어가는 것일지라도 나는 그 메시지에 응답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