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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씨 Oct 31. 2023

도망치지 않는 사람

꿈을 이룬 사람에 대하여

스스로를 카페인 중독자로 여기게 된 건 고등학교 3학년 때. 아침마다 캔 커피 하나씩을 들이켜지 않으면 하루 종일 비몽사몽인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당시는 일명 ‘테이크아웃 카페’라는 것이 전국에 무수히 생겨나던 때였다. 아메리카노라느니 라떼라느니 카페 뭐시기라는 메뉴가 등장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우리 학교 앞(혹은 같이 있던 대학교 앞)에도 무려 카페 세 곳이 비슷한 시기에 문을 열었다. 그중 정문에서 가장 가까운 가게에 점심시간이나 야간 자율 학습 땡땡이치고 자주 가게 되었다. 생애 첫 단골 카페였던 셈이다. 아침마다 마시던 캔 커피와 비교할 수 없는 부드러운 카푸치노는 전혀 새로운 커피 맛의 세계를 보여주었고, 에스프레소라는 것을 처음 맛본 것도 그 가게에서였다. 가끔 저녁 시간에 가면 주인아저씨가 팔다 남은 빵이나 음료를 싸주기도 했다. 한 번은 어떤 손님이 주인아저씨와 한참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주책맞게 끼어들어 그 손님에게 얻어 마신 적도 있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뻔뻔스러움이 그때는 있었나 보다. 어쨌든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카페에서 이런저런 추억이 참 많았다.


여하튼 내가 진짜 이야기하고 싶은 곳은 성북동에 있는 한 디저트 카페다. 정릉 북한산 입구 쪽에서 자그마한 동네 카페로 시작한 사장님이 점차 가게를 넓혀 새로 오픈한 곳이다. 숱한 회사원들의 로망, ‘퇴사하고 동네에 작은 카페나 하나 했으면 좋겠다.’ 바로 그 꿈을 실현한 분이다. 또한 그 로망이 각박한 현실과 부닥쳤을 때 얼마나 절망적인지 몸소 체험하고 끝내 극복해 낸 분이기도 하다.


우리 동네로 말할 것 같으면 소위 트렌디함이라던가 힙한 것과는 전혀 거리가 먼, 브랜드 없는 오래된 아파트와 연립 주택들이 즐비한 전형적인 서울 변두리의 소시민적인 동네다. 그 어떤 분위기라고는 찾기 힘든 곳에 어울리지 않는 아담한 카페가 생겼다는 것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커피와 다른 음료도 맛있고 특히 스콘이 맛있어서 자주 찾게 되었다. 열 평 남짓한 공간이 사장님의 꿈을 담기에는 너무 작았는지, 근처에 두 배 정도 넓은 가게로 옮겨갔다가 지금 성북동에 한옥을 개조한 멋진 디저트 카페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각종 케이크와 과자는 물론, 특히 다른 가게에서는 보기 어려운 비주얼과 맛을 갖춘 다양한 디저트가 매일 라인업을 달리하여 나온다. 디저트에 진심인 사장님이 밤낮없이 연구하고 개발한 결과물이다.


소박한 동네 카페에서 지금의 성북동 카페로 자리를 잡기까지 노력해 온 사장님을 보면,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산다는 것이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행운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참 많은 일을 겪어야 했을 것이다. 동네 사람들은 왠지 다 순박하고 좋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 누가 뭐라 해도 나만 열심히 노력하면 누군가는 알아줄 것이라는 생각이 현실에서는 그저 순진한 착각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전부 그만두고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어쩌면 사장님도 했을 것이다. 


나라면 어땠을까. 아마 결국 도망치고 말았을 거다. 이미 몇 번 도망치지 않았던가. 학교를 졸업하고는 취업이 어려우니 학원으로 도망치고, 역시 공부 체질은 아니라며 나를 받아주는 적당한 직장을 찾아 도망치고, 회사일이 안 맞는다는 핑계로 또 다른 적당한 곳으로 도망치고... 결국 제대로 된 커리어라는 것은 남의 이야기가 되고 말지 않았던가. 


현실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꿈을 이룬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잠시 재충전하는 시간을 갖고 돌아와 자신이 진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에만 집중하고, 쉼 없이 노력해서 끝내 다시 일어서는 사람이 꿈을 현실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사장님이 보여줬다.


갈 때마다 가벼운 인사만 할 뿐 살갑게 대화를 나누는 성격도 아니고 응원의 말 한마디 전할 용기도 없지만, 그런 나를 기억하고 오랜만에 만나도 이름을 부르며 반갑게 인사해 주는 사장님이 계신 곳. 나도 그런 단골 카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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