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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씨 Jan 01. 2024

실패한 글

아무도 관심 없는 일상의 기록

지난 일요일은 크리스마스이브라고 불리는 날이었다. 저녁 식사로 가래떡볶이와 모듬튀김 1인 세트를 포장해 와 배 터지게 먹고 침대 머리에 비스듬히 기대어 아직도 꺼지지 않는 뱃살 위에 조심스럽게 얹어놓은 노트북으로 이 글의 초안을 쓰고 있었다. 어디를 봐도 크리스마스이브라고 불리는 날의 풍경 같지는 않다.


낮에는 느지막이 일어나 동네 카페에서 초코말렌카와 콜롬비아 핸드드립 커피를 한잔했다. 말렌카는 ‘꿀 케이크'라고도 하는 체코의 전통 디저트다. 그냥(?) 말렌카도 있고 초코말렌카도 있는데, 이왕이면 건강에 더 안 좋을 것 같은 맛을 선호하는 초딩 입맛으로서 초코말렌카를 주문했다. 카페 구석 자리에 살포시 기대어 앉아 있는 아기 티거 인형을 보고 기분이 좋아졌다. 섬세한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아저씨들이 운영하는 카페인데, 곳곳에 무심하게 툭툭 앉혀놓은 인형들이 다소 이질적이면서도 신선하다. ‘귀여운 것이 세상을 구한다’는 말은 당연히 진리다.


커피(와 케이크)를 다 마시고, 길 건너 아리랑시네센터에 예매한 영화를 보러 갔다. 아리랑고개에 있어서 이름이 아리랑시네센터다. 어릴 적 처음 이 동네로 이사 왔을 때, 아리랑고개라는 이름에 피식 웃음이 났다. 미아리고개는 많이 들어봤지만, 아리랑고개는 처음이었다. 90년대 중후반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던 문제작(이면서 일부 초딩들의 본방 사수 프로그램), MBC 경찰청 사람들에서 본 아리랑치기라는 범죄 수법이 (하필이면) 떠오르기도 했다. 어쨌든….


‘백남준: 달은 가장 오래된 TV’라는 영화였다. 사실 예매할 필요도 없었다. 아리랑인디웨이브라는 독립영화 전용관에 관객은 나를 포함하여 대여섯 명 남짓. 백남준에게 관심이 있다기보다는 배우 스티븐 연의 내레이션을 듣고 싶어서 예매했다. 


평범한 이들의 인생도 뜯어보면 그러할 테지만, 한 사람의 일생을 통해 사회와 문화, 예술, 심지어 정치의 역사를 볼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특권층의 자제로 태어나 한국전쟁을 겪고, 사업가가 되기를 바랐던 부모에게서 도피하듯 유럽으로 떠났다고 한다. 독일에서 피아노와 작곡을 공부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쇤베르크 같은 현대 음악에 매료되었고, 존 케이지와 절친이었다는 것도. 


유럽이 세상의 중심이고 그들만이 우수하다는 문화 식민주의에 알게 모르게 젖어있던 당시 유럽인들에게 그들 밖에 다른 세계와 문화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단지 오락 매체로만 여겨지던 비디오를 예술 매체로 선택했으며 과감하고 전위적인 시도를 망설이지 않았다. 한 마디로 예술과 정치, 역사, 과학 등 모든 분야의 경계를 허물어뜨렸다.


백남준에 관한 최초의 기억은 어릴 때 아빠가 데려간 현대미술관(아마도 과천)에서 수십 대의 텔레비전으로 만든 설치 작품을 봤던 것이다. 예술적 감성이 그렇게 뛰어난 어린이는 아니었는지, 크게 감명을 받거나 충격을 받은 것 같지는 않다. 그 이후로도 그저 영상으로 이것저것 만드는 엄청 유명한 예술가라고 알고 있는 수준이었다. 솔직히 어떻게 이렇게 하나도 모를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아는 게 없었다. 오히려 그래서 처음 알게 된 내용이 잔뜩 나오니 영화가 더 재미있었다. 그리고 떡볶이 세트를 포장해서 집에 온 것이다.


쓰고 보니 이게 무슨 글인지 모르겠다. 산만하고 두서없고 정체를 알 수 없다. 나는 이번에도 실패했다. 쓰고 싶은 글을 쓰는 데에도, 읽고 싶어지는 글을 쓰는 데에도 실패했다. 지난번에도 실패했고, 다음에도 실패할 것이다. 매주, 매일, 매 순간순간 숨 쉬듯이 실패할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게 내가 실제로 느낀 것들이고, 아직은 내가 표현할 수 있는 전부이기 때문이다. (감히 비할 바는 아니지만) 영화에 나온 백남준의 말처럼 중요한 것은 성공하거나 실패했다는 것이 아니라, 해냈다는 것이다. 어떻게든 한 페이지 남짓 글을 써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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