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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씨 Jan 30. 2024

공부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비겁한 변명..이랄까..

지하철 3호선 안국역 1번 출구에서 옛 풍문여고 자리(현 서울 공예박물관)를 끼고 오른쪽으로 돌면 보이는 돌담길을 따라 걷는다.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덕성여중·고를 지나 한참을 더 걷다 보면 골목길 끝에 다다른다. 찻길 건너 대각선으로 보이는 언덕길, 정독도서관 입구다.


중고등학생 시절 자주 갔던 곳이다. 처음 정독도서관에 가본 것은 중학생 때 CA로 했던 도서관반 활동이었다. ‘도서반' 아니고 ‘도서관반'이다. 서울 시내에 있는 시립 도서관들을 하나씩 탐방하는 다소 독특한 활동이었다. 정릉에 있는 학교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 규모가 큰 정독도서관을 시작으로, 어마무시한 계단을 자랑하는 남산도서관, 덕성여대 근처에 있는 도봉도서관 등이 기억난다. 


고등학생 때는 종종 토요일 오전 수업 후에 가기도 하고, 일요일이나 방학 때면 동네 친구와 약속을 잡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있다 오고는 했다. 이렇게만 말하면 온종일 엄청난 학구열을 불태우다 온 것 같지만, 진실은 지금부터다. 


아침 일찍 일어나 ‘오늘은 하루 종일 도서관에서 공부해야지.’라는 야무진 포부를 안고 바리바리 짐을 싸서 집을 나선다. 5-1번 버스를 타고 40여 분을 지나 안국역에 내려, 덕성여중 앞에 있는 한솥도시락에 들러 제일 좋아하는 돈가스 도시락을 산다. (후에는 치킨마요로 최애가 바뀌었다는 후문….) 아니, 중간에 나와 도시락을 사러 갔던가…. 어쨌든, 거기서 또 한참을 걸어가 도서관 정문에 도착한다. 


지금은 열람실 앞에 키오스크에서 자리를 예약하고 들어가는 첨단(?) 시스템이지만, 그때만 해도 정문 경비실에서 종이를 코팅해서 만든 열람표를 받아서 들어가야 했다. 남자열람실, 여자열람실, 남녀공용열람실 각각 다른 색깔이다. 열람실 이용이 끝나면 열람표를 반드시 반납해야 한다. 이거 반납 안 하고 튀는 애들은 경비아저씨가 지구 끝까지 쫓아간다. 아마도 다음번에 줄 서지 않고 들어가기 위한 꼼수였을 것이다. 주말 아침에 조금이라도 늦는다? 이미 만석이라 누군가 나오면서 열람표를 반납하기를 오매불망 기다려야 한다. 자칫하면 그날 공치는 거다. 


여기까지만 해도 벌써 한두 시간이 훌쩍 지난다. 일단 열람실에 자리를 잡고 그날 공부할(거로 생각하고 가져온) 책들을 꺼내 영역 표시를 한다. 그중 하나를 펼쳐 잠시 집중이 되는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드는 시간을 갖는다. 한 시간은 지났으려나 할 때쯤 넌지시 쪽지가 넘어온다. “배 안 고파?” 기다렸다는 듯이 도시락을 들고 마당으로 나간다. 벤치 하나에 자리를 잡고 도란도란 수다를 떨며 점심을 먹는다. 이때부터 악마의 유혹이 시작된다.


정독도서관은 바로 옛 경기고등학교가 있던 자리로, 교정으로 쓰였던 곳이라 그런지 광활한 잔디밭과 분수대, 등나무 아래 무수히 많은 벤치 등을 갖춘 정원이 백미다. 하필 날씨가 좋으면 도저히 그냥 들어갈 수가 없게 된다. 밥도 먹었으니, 후식으로 캔 커피 하나씩 때리며 눌러앉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동네 친구나 학교 친구, 학원 친구라도 마주치면 휴식 시간은 무한정 늘어난다.


“이제 들어가야겠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열람실로 향하지만, 방심하지 마라. 앞서 이야기한 대로 이곳은 고등학교 교정이었던 곳이다. 정원 벤치 말고도 삼삼오오 모여서 농땡이 칠 공간은 도처에 널려있다. 건물과 건물 사이 외부 계단이나 구내매점 앞에서 또 누군가를 마주치고 간식을 나누며 한참을 떠들다 보면 이내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다.


‘여기까지 왔는데 조금이라도 하기는 하고 가야지.’ 살짝 죄책감이 드는 것도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또 들면 잠시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 다른 책을 펼친다. 일종의 요식 행위랄까….


비록 공부하러 간다는 표면상의 목적은 매번 실패했지만,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까지 또 한참의 밤 산책으로 이어지던 기억은 소중하게 남아있다.


요즘은 주말이면 삼청동과 북촌 일대에 어마어마한 인파가 몰리면서 그때의 운치는 찾아보기 힘들다. 안국역에서 도서관 정문까지 가는 길도 흡사 쓰나미를 방불케 하는 사람들의 파도를 뚫고 가야 한다. 처음으로 싸한 느낌을 받은 것은 도서관 건너편에 키엘 매장이 들어섰을 때였다. ‘이 동네도 이제 명운을 다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하지만 뭐, 어쩌겠나. 나의 추억이 깃든 장소가 핫플레이스가 되어버린 것이 아쉬울 때도 있지만, 나 또한 성수동이니 을지로니 찾아가서 인증샷 찍고 하지 않나. 세상 사람들의 템포가 나와 맞지 않는다고 해서 원망만 할 수도 없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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