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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씨 Feb 06. 2024

내가 살던 그 집

생각해 보니 지금까지 아파트에 살아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내가 경험해 본 주거 형태는 크게 세 가지, 단독 주택과 셋방살이, 빌라로 나눌 수 있다. 


태어나서부터 어린 시절을 보낸 집은 단독 주택이었다. 아주 넓지는 않지만, 기역(ㄱ) 자 모양으로 집을 둘러싼 마당과 화단까지 갖춘 이층 집이었다. 처음에는 우리 가족이 2층까지 다 썼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내 기억이 가물가물한 아주 어릴 때부터 2층은 전세를 주었던 것 같다. 


ㄱ자의 넓은 변을 담당하는 앞마당과 짧은 변의 옆 마당에는 각각 은행나무가 한 그루씩 있었고, 배나무와 감나무, 대추나무, 수국 등이 있었다. 은행나무는 암나무와 수나무가 따로 있어 둘이 근처에 심겨 있어야 은행이 열리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다행히 둘 다 동성이었는지 은행은 열리지 않았다. 안 그랬으면 매년 가로수 길에서처럼 지옥의 가을을 맛보았을 것이다. 배나무와 감나무는 과실을 수확할 수 있을 정도로 열리지는 않았지만, 매년 하얀 배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던 것과 자그마하게 열린 서양배를 보고 신기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반들반들한 감나무 이파리도. 감나무는 아마도 열매를 맺지 못했나 보다. 대추나무는 대추가 진짜 많이 열려서 수확할 때가 되면 커다란 소쿠리 두 개를 꽉꽉 채웠다. 아마 집에서도 먹고 여기저기 나눠주기도 했을 텐데, 지독한 편식쟁이였던 나는 거의 먹지 않았다. 


네다섯 살 때까지는 나보다 일곱 살 많은 작은언니가 자주 놀아줬는데, 특히 소꿉놀이할 때 이 화단이 아주 유용하게 쓰였다. 어디서 났는지 빨간 벽돌 쪼가리를 갈아서 만든 고춧가루를 물에 개어, 은행잎을 길쭉하게 결대로 찢은 다음 버무려서 이것은 떡볶이라고 명명했고, 수국 이파리는 깻잎무침이 되었다. (진짜 깻잎이랑 비슷하게 생겼다) 길쭉한 마당을 세발자전거로 누비던 기억도, 체육 시험 준비한다며 열심히 줄넘기 연습을 하던 기억도 난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분 좋은 기억은 바로 마당으로 쏟아지는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빨래를 널던 것이다. 열 살 안팎 어린이의 취미로는 다소 어울리지 않지만, 햇빛 좋은 날 바구니 가득 차 있던 빨래들이 철제 빨랫줄로 모두 가지런히 이사한 모습을 보면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었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체력과 부지런함이 있었나 보다. (지금은 그게 그렇게 힘들다. ㅠㅠ)


그러던 중 만으로 열한 살(초등학교 5학년)이 되던 해, 흔한 인생 스토리에 빠지지 않는 말처럼 ‘가세가 기울어' 제법 먼 동네로 이사하여 셋방살이를 약 1년 반 정도 하게 되었다. 큰언니는 본의 아니게 동네 근처에서 급히 자취를 시작했고, 나머지 네 식구가 방 두 칸을 나누어 쓰게 되었다. 전에 살던 집에 비하면 거실도 없고 부엌을 가려면 방을 가로질러 가야 했기에 불편하긴 했지만, 철없던 막내는 그 집에서도 나름의 즐거움을 찾았던 것 같다. 함박눈이 내리는 겨울에는 아랫집 사는 친구와 집 앞 좁은 비탈길에서 신나게 썰매를 타느라 온 동네 사람들의 안전을 위협하기도 했고, 장독대에서 혼자 미끄럼 타며 놀다 대자로 자빠져서 꼬리뼈에 멍이 들기도 했다. 말 그대로 뼈아픈 고통이었지만 재미있었으면 됐지….


그리고서 중학생 때부터 지금까지는 쭈욱 오래된 빌라에 살고 있다. 4층인데 엘리베이터도 없고, 창틀도 틀어져 겨울에는 위풍이 숭숭 들어오는 낡은 빌라. 장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놀러 왔던 친구가 주방의 한쪽 면이 대각선으로 꺾인 것을 보며 “우와 너희 집 되게 예쁘다!” 하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니 흔하게 볼 수 있는 구조는 아닌 것도 같았다. 


“그래?” 

갸우뚱하는 나에게, 

“너 여기 예쁘다는 생각 한 번도 안 해봤지?” 


친구의 말을 듣고 어쩐지 뒤통수를 살짝 맞은 기분이었다. 달동네 같은 곳에서 셋방살이하면서도 매일 그저 즐겁게만 보내던 그 어린이는 자라서 왜 이 오래된 빌라의 예쁜 점은 보지 못했던 것일까?


왜 지금은 무엇을 하던, 어디를 가던, 누구를 만나던 장점보다 단점이 먼저 보이는 것일까. 항상 모든 것이 전적으로 나쁘기만 하지는 않을 텐데, 좋은 기억은 왜 점점 남지 않을까. 왜 점점 즐겁지 않을까. ‘왜 이렇게 된 걸까?’라는 생각도 그저 불평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모르겠고, 그냥 철들기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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