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설지만 살만한 곳

쇼도시마 여행기 2

by 메밀

함박웃음, 크고 환하게 웃는 웃음. 나는 사실 함박웃음을 잘 짓는 사람은 아니다. 유튜브나 넷플릭스를 보다 낄낄대는 것 말고는 길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서 인사할 때 짓는 옅은 미소 정도가 다인 것 같다. 이런 나에게 함박웃음을 곁들인 친절을 베푸는 사람들을 만날 때면 괜히 어색해지고는 한다.


최근에 만난 함박웃음을 떠올리자니, 자연스럽게 쇼도시마 여행 이야기를 이어서 해야 할 것 같다. 지난번에도 말했듯이 쇼도시마는 작은 섬으로, 선술집(이자카야)을 제외한 웬만한 영업집은 해 질 무렵이면 문을 닫는다. 숙소를 예약할 때도 주변에 저녁 식사를 할 만한 음식점은 거의 없어서, 도착하는 첫날 음식과 재료를 구매해서 가져오는 것이 좋다는 안내가 있었다. 차가 있다면 선택의 폭이 조금 넓겠지만, 뚜벅이 장롱면허 소지자는 부엌을 뒤져 김 한 봉다리와 참치캔 따위를 몇 개 챙기고, 공항 편의점에 들러 햇반 두어 개를 보충한다. 그렇게 나름 준비한 비상식량과 매일 다른 섬이나 도시에 다녀오면서 발견한 카레 등 특산물 반찬으로 저녁 식사를 해결했다.


IMG_3249.jpg 토요 올리브숍 앞 사거리에 있는 무사고 기원 개구리단, 귀여우면 일단 찍는다.


분명 회사에 다닐 때는 아침마다 잠과의 전쟁을 치르는 게 일상이었는데, 여행을 가면 지독한 귀차니스트도 신기하게 초 아침형 인간이 된다. 역시 모든 것은 마음에 달린 것이니……. 쇼도시마에서의 세 번째 아침, 새벽같이 일어나 숙소 기준으로 섬의 반대편인 도노쇼 항에서 8시 40분에 출발하는 우노행 페리 탑승에 성공했다. 일기예보에 비가 온다더니 배를 타자마자 보슬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오카야마현 남쪽 끝에 있는 타마노시의 우노 항에 내리자, 비가 뚝 그치고 해가 쨍쨍하다. 분명 하루 종일 비가 온다고 했는데, 그래서 선크림 얼굴에만 발랐는데……. 팔뚝과 목덜미, 쇄골까지 시뻘겋게 익어간다. 예술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꾸며진, 대도시의 역과는 또 다른 감각적인 느낌으로 재탄생한 JR 우노역에 들러 안내소에서 세토우치 트리엔날레 굿즈와 오카야마 특산물 복숭아 스틱 케이크를 담았다. 복숭아 케이크는 다음 날 쇼도시마에서의 마지막 아침 식사가 된다. 우노 항과 항구 옆 상점가 곳곳에 설치된 미술 작품들을 감상하고 출출해진 배를 채우러 카페에 들렀다. 한자로 시대옥(時代屋)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다소 설렁탕집스러운 이름의 카페에서 브런치 세트를 주문했다. 사이픈으로 내린 커피와 토스트, 샐러드를 흡입하고, ‘파워 베이스’라는 배터리 제조 공장에 있다는 설치 미술 작품을 감상하러 길을 나섰다.


IMG_3259.jpg JR 우노 미나트 선 아트 프로젝트 by 에스텔 스토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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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겸 레스토랑 시대옥


방파제에서 휴식하며 날개의 물기를 연신 털어내고 있는 바닷새들을 구경하며 터덜터덜 해안 도로를 걷는데, 반대쪽 차선에서 달리던 오토바이 아저씨가 저 멀리 유턴해서 다가오더니 내 옆에 오토바이를 세우고 굳이 내려서 박스에서 뭔가를 꺼내 건네준다. 예술제 기간에 운영하는 무료 셔틀버스 전단이다. 덕분에 항구로 돌아갈 때는 편하게 이동했다. 이 기간에는 예술제 자원봉사자들뿐 아니라, 온 마을 주민들이 봉사자 모드로 돌입하는 것 같다. 먼저 도움을 청하지 않았음에도 너도나도 뭐라도 알려주고 싶어서 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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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del of Something by Teppei Kaneuji


파워 베이스의 작품을 감상하고 팝업 카페에서 ‘덴키비네이드’라는 특선 음료를 들이켰다. 지역 특산물로 만든 것 같은 상큼하고 시원한 음료였는데, 어느덧 셔틀버스 출발 시간이 임박하여 급한 마음에 사진도 못 찍었다. 언젠가 오카야마에 다시 갈 일이 생기면 그 카페를 찾아봐야겠다.


우노 항에서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다시 쇼도시마행 배를 타고 6시쯤 도노쇼 항에 내렸다. 숙소가 위치한 이케다 항과는 달리 제법 번화가라고 할 수 있는 도노쇼 항 근처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들어가야겠다는 충동이 일었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 시간은 일반 음식점은 웬만하면 모두 마감하고 이자카야는 하나둘 문을 여는 시간이다. 구글맵으로 근처에 영업 중인 가게 한 곳을 찾았다. 입구에 큰 여행 가방을 들고 있는 관광객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알고 보니 료칸과 이자카야를 겸하는 곳이다. 곧 주인아주머니가 나와서 앞에 있던 숙박 손님들을 먼저 안내하기를 기다렸다.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치고 모자라는 일본어와 온갖 손짓을 동원하며 식사하러 왔음을 알렸더니, 이자카야 입구는 반대편이라고 알려주셨다. 지도에는 이자카야 영업이 시작된 것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아직 문을 열기 전이어서, 의도치 않게 저녁 오픈 첫 손님이 되었다.


리뷰 사진에서 교자성애자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야끼교자(군만두)와 사장님 추천 메뉴 볶음밥을 주문했다. 잠시 후 아주머니는 정갈하게 한 상을 차려주고 손수 종지에 간장을 붓고 라유를 섞어주셨다. 빛의 속도로 식사하는 동안 아주머니는 냉장고에서 꺼내 온 것을 한참 붙잡고 낑낑거리더니, 작은 접시에 과일맛 모찌 두 개를 담아내어 주셨다. 아주머니가 잠깐 돌아선 사이, 테이블 위의 접시란 접시는 싹 비워졌고, 그걸 본 아주머니는 아주 크게 웃으셨다. 잠깐 돼지가 된 것 같은 부끄러움이 스쳤지만, 아주머니를 웃게 해 드렸다는 어쩐지 뿌듯한 마음도 들었다.


IMG_3328.jpg 야끼교자와 볶음밥. 일관성 없는 테이블 매트와 젓가락 받침에서 가정식 느낌이 물씬 풍긴다.


세월이 갈수록, 나이가 들수록 주변 사람들은 멀어지고 웃을 일은 줄어든다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낯선 장소에서 만난 친절한 사람들의 미소를 떠올려본다. 그래도 아직 이 세상은 좋은 사람들이 더 많은, 살 만한 곳이라고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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