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하냐건 눕지요
누군가 대뜸 “뭐 하는 사람이오?”라고 묻는다면, 농땡이 치는 이라고 답하리다. 백수는 농땡이 치는 것이 직업이라오.
원래 백수가 제일 바쁘다고 했던가. 새로운 일을 시작해 보고자 했지만 현실은 뭐라도 내 마음대로 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야속한 육신은 급속도로 늙어가고 있다. 이렇게 여유를 부려도 되나 싶지만, 정작 해야 하는 구직은 애써 모르는 체하며 하고 있는 일들을 적어 내려가 본다.
우선 태재 작가님이 진행하는 온라인 프로그램 에세이 드라이브에 참여 중이다. 지난가을 중지된 드라이브 이후, 남들 다 쓰는 일기도 한 자 쓰지 못한 채 브런치 계정도 개점휴업 상태가 되어버렸다. 혼자서도 잘하는 씩씩한 어린이도 되지 못하고, 누가 떠먹여 줘야 겨우 소화하는 갓난쟁이에서 조금도 성장하지 못했던 것일까. 기온과 습도가 올라갈수록 한없는 게으름에 잠식당하고 있던 차에 반가운 컴백 소식이 들려와 바로 3기수를 등록했다. 다시 완주할 수 있을지 자신도 없으면서. 어쨌든 지금까지는 순항 중이다.
2주 전부터는 더미 북 만들기 워크숍에 참가하고 있다. 그동안 아이패드로 찌끄리던 짧은 만화를 손바닥만 한 그림책으로, 그냥 부담 없이 편하게 접할 수 있는 그림과 메시지를 엮어보고 싶다. 제대로 배워본 적도 없는 허접한 그림이 과연 공감을 얻을 수 있을지 보장할 수 없지만, 개인 소장용으로라도 일단은 손에 잡히는 실물로 확인이나 해보자는 마음이다.
집에서 도보 30분 거리에 있는 요가원에 다닌 지는 꽤 오래되었다. 벌써 1년이 다 되어가지만, 그마저도 농땡이 피우면서 설렁설렁 다닌 탓인지 그동안에 자세가 나아지거나 조금이라도 숙련되고 있다는 느낌은 전혀 없다. 여전한 라운드 숄더 거북이는 그나마라도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느냐며 스스로를 위로해 본다.
또 뭐가 있을까. 책상을 둘러보니 <How to Draw Almost Everything>이라는 책이 눈에 들어온다. 언제인가 합정역 교보문고에서 집어 온, 모서리는 해지고 표지에는 거대한 커피 얼룩이 남아 있는 낡은 책. 일본의 한 일러스트레이터가 아이들이 그림을 그려달라고 할 때 참 난감하다는 친구의 고백을 듣고, 다양한 사물들을 표현하는 단순한 테크닉을 개발하여 만든 일종의 레퍼런스북이다. 아이패드와 애플펜슬을 처음 사고 게임기로만 쓰다가, 하나씩 따라 그리며 연습해 보려고 사놓은 것이다. 아직 절반도 채 해보지 못했지만, 생각날 때마다 펼쳐서 끄적여보고 있다.
올봄 부산으로 당일치기 여행을 갔을 때 보수동 책방 골목의 한 헌책방에서 건진 소설책도 아직 읽는 중이다. 핀란드 작가 아르토 파실린나의 <모기 나라에 간 코끼리>라는 장편 소설. 이건 그래도 3분의 1 정도 남았으니 양반이다. 유럽에서 동물이 출연하는 서커스가 금지되면서 머나먼 여정을 떠나는 한 코끼리와 그 조련사의 이야기이다. 원체 책을 느리게 읽는 편이기도 한데, 조심스럽고 점잖게 내딛는 코끼리의 발걸음처럼 천천히 읽고 있다.
내일부터는 또 새로 등록한 학원이 개강하는 날이고, 도대체 언제 다 보려는지 기약이 없는 일본어 첫걸음 책도 애써 외면하는 내 눈길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다. 매주 글감을 받고 끝내 월요일까지 만지작거리며 무엇을 써야 할지 도저히 생각이 안 날 때는 인디자인 강의 영상을 틀어놓고 글쓰기를 농땡이 치고, 아이패드를 펴고 참새와 열대어 따위를 따라 그리면서는 책 작업을 농땡이 치고, 이도 저도 다 귀찮을 때는 넷플릭스를 열고 세기말 만화 몬스터를 정주행 한다. 언제까지 이렇게 한량 같은 일상을 누릴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모르겠다. 인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