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터닝포인트

by 폴작가


[교회봉사팀과 조우]


아이고! 정현아 얼마나 고생을 했으면 살 빠진 것 좀 봐.
권사님들 왔으니 같이 있는 동안은 맛있는 것 많이 해줄게.


공항 입국장에서 나를 보자마자 멀리서부터 오양숙 권사님께서 손을 흔들며 나를 반겨주셨다. 만나자마자 맛있는 것을 해주신다는 말에 그동안 가지고 있던 긴장감이 확 사라졌다. 비록 일주일이라는 짧은 시간이지만, 당분간은 가족 같은 분들과 지낸다는 생각에 마음 한편에 큰 쇳덩이 같은 짐을 내려놓은 기분이었다.

오양숙 권사님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낸 분이다. 오랜 여행을 떠난다고 엄마를 통해 용돈도 주셨을 뿐만 아니라, 이후 여행을 하면서도 늘 결정적인 순간마다 소중한 후원을 해주셨다. 여행이 끝난 이후에도 정착할 돈도 없어서 아무것도 해드리지 못하는 내가 서운하셨을 수도 있으실 텐데, 늘 자신의 나눔에 생색 한 번 내본 적이 없으셨다. 늘 말없이 날 도와주셨던 그런 고마운 분이시다.

권사님들께서는 오시자마자, 불고기, 비빔밥, 해물 아귀찜, 여행을 하면서는 도저히 먹기 힘든 음식들을 상다리 휠 정도로 차려주셨다. 이미 충분히 넘치고 넘치는 데도 불구하고 권사님들은 자꾸 조금이라도 더 먹이시려고 챙겨주셨다. 숙소도 혼자서 편하게 지내라며 엄청나게 큰 더블룸을 혼자 쓰게 해주셨다. 눈치 보지 말고 지내라며, 나의 개인 시간도 존중해주시며, 필요한 일이 있으면 늘 호출해도 괜찮은데, 쉴 때는 일이 있어도 부르시지 않으셨다. 비록 몸은 타지에 있지만 잠시나마 고향 같은 우리 교회 식당에 온 것과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정말 마음 편안한 시간들이었다.



[물 위에 떠 있는 마을]


우리가 가야 하는 곳은 이 도시에서 모터보트를 타고
약 1시간 정도 들어가야 도착하는 곳입니다.
오지 지역이라 물이나 전기가 잘 공급이 잘 안됩니다.


캄보디아는 전기나 물이 원활하게 공급되지 않는 지역이 많다. 그나마 물은 자국내에 큰 호수가 있어서 괜찮지만, 대부분의 전기 공급은 태국이나 베트남에서 생산된 전기를 수입하고 있다. 국가 내에 자체적인 발전 시설이 없다 보니, 배를 타고 한 시간 이상 들어가야 하는 곳 같은 오지의 경우는 전기나 수도 공급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시엠립과 같은 제2의 도시에서도 번개가 치면 전기가 나가버려서 자가발전기로 돌려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조차도 여유가 있는 집에서나 누릴 수 있는 호사였다.

캄보디아는 동남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다. 아주 오래전에는 동남아의 패권을 쥐고 있던 거대한 제국이었지만, 현대에 와서는 1979년에 크메르 정권이 약 70만 명에 이르는 지식인들과 국민들을 대규모 학살하면서 지금은 동남아에서 가장 발전이 더디고 가난한 나라가 되었다고 한다. 전 세계에서 가장 못 사는 나라 중 하나지만, 그래도 다른 나라보다 나은 점이 있다면 관광객들을 모을 수 있는 문화자원이 많다는 점이다. 실제로 캄보디아 시엠립에 있는 앙코르와트 유적지 하나가 국가 수입의 80%를 차지한다고 하니 캄보디아 얼마나 가난한 나라인지 단 번에 알 수 있었다.

1시간이 지나 도착한 마을은 수중 마을이었다.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처럼 물 위에 집을 지은 마을이었는데, 수산업을 주로 하는 주민들이 많다 보니 각자의 집에 배를 잘 정박하기 위해 이렇게 지어졌다고 한다. 확실히 바닷가 바로 옆 마을이다 보니 말도 못할 정도로 습한 기운이 온몸을 감쌌다. 마을 전체는 온통 습지로 둘러싸여 있어서 한낮인데도 모기들이 바글거렸다. 불쾌지수가 높아 인상을 팍 쓰면서 마을로 진입하는데, 이런 불쾌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은 미소 띤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했다.



[때묻지 않은 아이들의 미소]


오지라고는 했지만 생각보다 아이들의 복장 상태는 깔끔했다. 알고 보니 수많은 NGO들이 이곳을 방문하여 나누어준 옷 들이라고 한다. 마을 곳곳에는 한국 NGO가 세운 우물들도 많았다. 그래도 다른 지역보다는 문화적 혜택을 많이 받고 있는 아이들이었다.

우리 일행은 더운 날씨와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인상을 쓰고 있을 때가 많았는데, 아이들은 그런 것들을 별로 느끼지 못하는지 천진난만한 얼굴이었다.

아이들은 작은 것 하나에도 정말 좋아했다. 당시만 해도 프린트가 따로 없어서 사진을 찍어줄 수도 없었는데 아이들은 찍어서 보여주기만 해도 신기해하고 좋아했다. 핸드폰에 담긴 동영상만 보여줘도 아이들은 마치 처음 본 것처럼 요란법석을 떨었고, 생전 처음 보는 팥빙수 앞에서도 맛있다며 불평하나 없이 싹싹 긁어먹었다. 그런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행복이란 사실 무언가를 더 소유하는 것보다 누리는 것에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우리 모두가 웃으려고, 또 행복하려고 열심히 사는 것일 텐데, 우리는 어느 순간 열심히 사는 것 자체에 함몰되어 살 때가 많았으니까.

요즘 한국에서는 아이들의 얼굴에서도 웃음을 보기 힘들다. 한국에서는 웃는 것도 허락을 받아야 하는 분위기이다. 어린아이가 어른스럽게 행동을 못하면 혼나기 일쑤고, 웃는 것도 때와 장소를 가리라고 강요받는다. 틀릴 수도 있는 거고, 실수를 할 수도 있는 건데 스스로 알아갈 기회를 주지 않는다. 뭐든지 '교육'을 통해서 계몽된다고 믿는 것일지는 몰라도 자유로운 인간의 감정을 어릴 때부터 통제를 받을 때가 많다. 요즘은 한국에서도 재밌는 현상을 볼 수 있는데, 그런 교육(?)을 받은 어린아이들이 어려서부터 또래 친구들에게 우월의식을 표현하는 경우가 잦아졌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고급아파트에 사는 아이가 일반 아파트에 사는 아이를 무시하는 경우다.

또 하나는 아마도 뛰어놀 시간을 많이 잃어버린 이유도 있을 터.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유치원 때부터 국제유치원을 보내기 위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을 경쟁의 쳇바퀴에 던져놓기 시작한다. 초등학교 때는 좋은 학군의 중학교를 보내기 위해 경쟁하고, 중학교 때는 자사고, 특목고와 같은 곳으로 가기 위해 경쟁하며, 고등학교 때는 명문 대학을 위해, 대학에서는 좋은 기업에 취업하기 위해서, 취업 후에는 좋은 스펙을 가진 배우자와 살기 위해 경쟁하고 경쟁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런 사회 분위기에 벌써부터 지쳤는지(?) 초등학생들에게 꿈을 물어보면 임대업자라고 하는 웃지 못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자신의 의사는 철저히 배제되고 무조건 하나의 목표를 향해 강압적인 고등(?) 교육들을 받아내고 있으니 어찌 보면 웃음을 잃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아무리 발전하는 것도 좋고 중요하지만, 결국은 그 모든 것이 우리가 더 행복하기 위해서 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했다. 모든 것을 얻고 이룬다 한들, 우리의 일상의 삶에서 미소를 잃어버리고 살 수밖에 없다면 사실 그것은 더 이상 발전이라고 지칭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미소를 잃지 않고 사는 캄보디아 아이들이라고 해서 백 퍼센트 한국의 아이들보다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는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미소를 통해서 다시 한 번 삶의 방향성과 행복을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다.

누군가 말대로 국민이 똑똑하지 못하면 민주주의는 재앙이라고 했던가. 아무런 목적의식이 없는 발전이 결국 숨통 막히는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들어왔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모든 노력이 행복이 아닌 욕심을 위한 것으로 변질되어버린다면, 우리의 모든 노력은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재앙으로 바뀔지도 모르겠다.



[감사하는 마음]


머리를 못 감아서 그런지 머리에 이가 엄청 많네요.

본 교회 권사님들께서는 주로 미용 봉사를 많이 하셨다. 그늘에서 봉사를 하시기는 했지만 습한 날씨 속에서 하루 종일 제대로 쉬지도 못하시면서 이발을 하는 것이 쉽지는 않으셨을 거다. 무엇보다도 물이 넘치는 지역이 아니기 때문에 씻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로 인해 이발을 하시는 데 애를 먹으실 때가 많았다.

머리가 오랫동안 감지를 못 해서 떡이 져있는 경우가 많아 가위질을 하기도 만만치 않아 보였다. 게다가 오랜 시간 미용을 하신 후, 손에 가려움을 종종 느끼셨는데, 머릿속에 이가 많아서 그런 것 같았다. 하루 종일 수많은 사람들의 머리를 만지시다 보니 마치 베드 버그가 피부에 올라와 온몸을 가렵게 하는 듯했다.

그래도 단 한 번도 불평하지 않으시면서 땀 흘려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셨다. 좋아하는 일로 땀을 흘리면서도 덥다고 속으로 불평하는 나의 모습을 보며 부끄러움이 많이 느껴졌다. 범사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모든 것이 채워졌을 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그에 맞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감사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주는 진실한 열매였다.

대낮에 그 고생을 하고 오시 고도 집으로 돌아와서 따뜻한 숭늉과 손으로 김치 한 줄을 찢어 입속에 넣으시면서 웃으시던 어르신 분들의 모습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드는 밤이다.



[나에게 사소한 것이 누군가에게는 다르게 느껴질 수 있다]


단기봉사팀이 가지고 온 비눗방울은 아이들에게 아주 즐거운 장난감이 되어주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작 500원이면 살 수 있는 사소한 것인데, 캄보디아에서는 쉽게 구할 수 없는 것이다 보니 아이들의 눈이 휘둥그래 커지면서 단숨에 비눗방울 한 통을 거뜬히 비워버렸다.

뿐만 아니라, 아이들은 경험한 것들이 많이 없어서인지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 두 반응이 뜨거웠다. 다 써버린 비눗방울 통에 200mL 도 안 되는 비눗물을 리필해 넣어줄 때 짓던 해맑은 미소, 처음 보는 팥빙수 한 그릇을 얼른 해치우고 눈치를 보다가 한 그릇 더 받았을 때 행복해하던 그들의 모습을 보며 행복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게 행복이 아닌가 싶다. 늘 그랬다. 행복은 절대적인 무언가가 나에게 주어졌을 때 오는 것이 아닌, 내가 처해있는 상황 속에서 나의 시선과 태도로 인해 느낄 수 있는 상대적인 감정일 때가 많았다.

그런 걸 돌아볼 때, 무작정 최대한 많이 보고, 최대한 많이 경험한다고 해서 행복한 삶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봐야 할 때는 충분히 보고, 보지 말아야 할 때는 보지 않을 용기도 가질 수 있으며, 좋은 경험을 더 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지금까지 경험한 것을 통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면,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용하는 모든 것의 절대량과 상관없이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팥빙수]


아이들은 팥빙수를 참 좋아했다. 얼음을 구하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저장할 곳도 변변치 않기 때문에 아마 살면서 몇 번 못 먹어보는 이들에게는 아주 고품격 디저트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 입장에서, 팥빙수를 만들기 위한 재료인 연유, 우유, 과일이 너무나도 저렴했기 때문에 모자라지 않게 아이들에게 맛 좋은 팥빙수를 제공해줄 수 있었다.

습하고 푹푹 찌는 캄보디아에서 팥빙수만큼 우리 봉사팀에게도 부족한 당과 수분을 채워주는 좋은 식품은 없었다. 나도 밥을 먹지 않아도 될 정도로 팥빙수를 입에 달고 살았다.



[첫 번째 가족사진 나눔]


마지막 날, 10가족 정도 되는 가정의 가족사진을 찍어주었다. 우리나라처럼 스마트폰이 보급되지 않은 캄보디아에서는 사진을 갖기 위해서는 인화된 사진이 필요했다. 당시에는 사진 프린트를 갖고 있지 못 해서 사진을 나눠줄 수 없었지만 선교사님께서 데이터를 주면 자신이 작게 뽑아서 이들 가족에게 전달해주시겠다고 하여 약소하게나마 가족사진을 찍어줄 수 있게 됐다.

특별한 테크닉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특별한 작업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까지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진은 가족사진이 된 이유는 사진의 본질을 그대로 드러낼 수 있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특별한 장비를 소유하지 않아도 소중한 사람을 다시 한 번 기억할 수 있게 하는 능력, 사진만이 가진 유일한 힘이 아닐까. 이 시간을 이후로 사진인화 프린터를 꼭 구매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얼마 되지 않아 소중한 분으로부터 포토프린터를 선물 받았다.


[희망의 씨앗]


캄보디아를 왔는데 앙코르와트는 안 가니?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앙코르와트가 뭔지를 전혀 몰랐다. 내가 캄보디아에 들어온 이유는 앙코르와트를 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봉사팀의 사진을 담아주기 위해서였다. 봉사활동이 거의 끝날 때가 되어가자, 동행하신 신주영 장로님께서 그다음에는 어디로 가냐며 물으셨다. 딱히 계획이 없어서 우선 프놈펜으로 돌아갈 생각이라고 했다.

장로님은 앙코르와트는 유네스코에서 지정된 캄보디아의 가장 큰 유적지라며 추천을 해주셨다. 하지만 관심을 가질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결국 걱정을 했던 그 순간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남은 돈은 고작 5만 리엘이 전부였기 때문에 프놈펜에서 집으로 돌아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을 장로님께 말씀드릴 수는 없어 우선 알겠다는 말만 전했다.


그동안 수고했다. 얼마 안 되지만 여행하는데 보태 쓰렴.
이건 내가 주는 것이고, 이건 권사님들이 남은 달러를 모아 주신 거야.


떠나기 전날, 신주영 장로님과 오양숙 권사님께서는 나를 방으로 부르시더니 쌈짓돈을 손에 쥐어주셨다. 모두가 모아주셨던 그 돈은 한국 돈 10만 원과 70달러였다. 그동안 수고했다며 다음 여행에 보태 쓰라며 주신 용돈이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사실 프놈펜 한인 교회를 찾아가 사정을 말씀드리고 며칠간 교회 측에 사진으로 도움을 드리면서 대안이 떠오를 때까지 버텨볼 생각이었다. 어르신 분들께서 남기고 가신 약 19만 원이라는 여행 비용은 한국에 있을 때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돈이었을 수 있지만 지금 나에게는 너무나도 큰 힘이 될 수 있는 희망의 씨앗 같은 존재였다.

갑작스러운 여행비용이 생겼기에 다음 목적지는 프놈펜이 아닌 장로님께서 추천해주신 앙코르와트가 있는 시엠립으로 결정지었다. 물론 그곳에 가서도 다른 대안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선 캄보디아에서 가장 여행자들이 많이 몰리는 곳이니 가면 또 다른 대안이 생기지 않을까라는 믿음을 갖고 출발하기로 했다. 뭐 안되면 앙코르와트 입구에서 하루 종일 죽치고 있으면 어떻게든 답이 나오겠지라는 생각으로.

사진 / 글 폴작
작가블로그 walking-studio.com
작가인스타 @walking_st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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