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에 어떤 삶이 펼쳐질지 그리 큰 희망을 품지 않았다. 그저 잡초가 무성한 미지의 숲길을 낫으로 헤치며 정해진 하루의 분량을, 오늘의 태양이 어제의 태양 같은 그렇고 그런 삶을 살았다. 그러다가 가끔 그러한 일상의 풍경이 반짝, 하고 빛나는 순간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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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청학동에서 온 듯한 긴 턱수염에 청바지 차림의 남자가 지하철을 타려고 서 있다. 지쳐 보이는, 그러나 무언가를 갈망하는 듯한 눈동자. 그가 짊어진봇짐 밖으로 붓통이 보인다. 붓은 열 개 남짓. 순간 그가 과거에서 온 고산자 김정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정호 형, 하고 나지막하게 불러 보았지만, 그는 뒤돌아보지 않고 출구를 향해 걸어갔다.
그는 가고 나만 홀로 남았다. 그의 뒤를 따라가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때 불현듯 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혹시 내가 서 있는 이곳이 이순신 장군이 어렸을 때 동네 꼬마들과 팽이를 치던 곳은 아니었을까? 혹시 이곳이 허준이 동의보감을 쓰기 위해 먹을 갈던 곳은 아니었을까? 그러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5-2'라는 객차 번호가 또렷이 새겨져 있는 그곳을 물끄러미 바라다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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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을 빠져나와 어둑해진 밤길을 홀로 걷는다. 걷는다는 것은 어디로든 갈 수 있다는 것을 꿈꾸게 한다.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 나가면, 하고 어릴 적 즐겨 부르던 동요처럼. 우리는 앞으로, 옆으로, 심지어는 뒤로도 걷는다.
걷다 보면 앞만 바라본 채 달리는 이를 여럿 만난다. 날씨가 기가 막히네요, 하고 먼저 인사를 건네기도 하고, 가방에 든 콜드브루와 헤이즐넛을 조금 나누기도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와의 거리는 멀어지고 만다.
그러다가 전혀 경험해 보지 못했던 새로운 풍경들을 마주하기도 하는데, 그때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돗자리를 깔고 백팩을 내려놓은 다음, 주위를 거닐어 보기도 하고, 이제 막 단풍이 들기 시작한 나뭇잎을 줍기도 하고, 사진을 찍거나 무언가를 끼적이기도 한다. 물론 가만히 자리에 앉아서 공상에 잠기기도 한다.
가끔은 같은 길을 걷는 이를 우연히 만난다.
"어디서 왔나요", "아, 그 영화 기억나요."
어느새 대화는 무르익고, 사랑에 관한 이야기의 향연이 펼쳐진다. 그러다가 갈림길에 이르면, 이름과 연락처가 적힌 메모지를 주고받고는 각자의 길로 흩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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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음에 어떤 길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태양이 자취를 감추고 세상 모든 것이 잠자리에 들더라도, 내일이면 다시 일어나 꿈틀거리며 걷기 시작할 것이다. 꿈꾸기 시작할 것이다. 일상의 풍경이 반짝, 하고 빛나는 그 순간들을.
요즘 걷기와 관련된 책들이 참 많은 것 같아요. 저는 스위스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Walking Man'이라는 작품을 좋아해요. 무언가를 응시하며 고독하게 걷는 모습이 마치 저를 보는 것 같아요. 요즘엔 아이와 산책을 하며 걷기의 매력에 대해서 생각하곤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