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 길 위에서
길고 길었던 기다림 끝에 드디어 안나푸르나 트레킹 시작.
당초 계획으로 써킷(Circuit) 코스를 선택하려 했으나, 포카라 도착 첫날 문의한 트레킹 여행사에서 내게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ABC)와 푼힐(Poonhill)을 도는 코스를 추천해 주었다. 이유는 써킷은 차도가 생겨 시끄럽고,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조그만 동양 여자가 걷기에 체력상 ABC가 더 낫다고 판단했을 터. 다른 건 몰라도 무엇보다 시끄럽다는 이야기에 고민이 되었다. 그래서 결국 ABC를 선택. 그러나 나중에 듣기로 어떤 사람은 ABC보다 써킷이 고도는 높지만, 오르막 내리막 경사가 없이 주욱 걷는 코스라 써킷이 더 쉽다고도 하고, 사람마다 의견은 천차만별이었다. 어쨌든 나는 이번에 ABC를 선택했고 결과적으로 매우 매우 만족!!! 죽기 전에 한번 더 오고 싶은데, 그때는 써킷 코스를 걸어봐야겠다.
포터는 여행사에서 구하려 했으나, 숙소 옆 트래킹 용품 샵을 운영하는 네팔 친구 라즈와 친해져 그 친구로부터 오르준이라는 포터를 소개받았다. 여행사에서 알아본 포터 일당보다 저렴한 가격에 포터를 고용할 수 있었다. 오르준도 수수료를 떼지 않아도 되니 여행사에서 포터 일을 구하는 것보다는 더 많은 일당을 받을 수 있어 서로 윈-윈이었다. 10일 일정으로 푼힐+ABC를 도는 코스를 시작했다. 운 좋게도 열흘 동안 흐린 날이 딱 하루뿐이고(이 흐린 날조차도 하산 끝무렵), 내내 맑은 날씨 속에서 보낼 수 있어 하늘과 설산 풍경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드디어 내가 안나푸르나를 오르는구나... (정확히 말하면 안나푸르나라기보다 안나푸르나를 보며 베이스캠프를 찍는 것) 카트만두에서 그렇게 애를 태우며 그리워하던 안나푸르나... 전날 밤 설레어 잠이 안오...지는 않았다. 숙면을 취한 후 아침 일찍 일어나 나머지 짐은 포카라 숙소에 맡기고, 오르준이 멜 배낭과 내가 멜 작은 배낭만 챙겨 나온다. 아침을 든든히 챙겨 먹고, 미리 예약해 둔 택시를 타고 출발지인 나야풀(Nayapool)로 향했다.
(혹시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 나야풀- 울레리- 고레빠니 - 푼힐 - 타다빠니 - 촘롱 -도반 - MBC(마차푸차레 베이스 캠프) - ABC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 - 뱀부 - 지누 - 오스트레일리안 캠프 - 종착지 순으로 열흘간 트레킹했습니다.)
ABC 크레킹의 출발점인 마을. 나야풀
저 멀리 보이는 마차푸차레. 네팔어로 '물고기의 꼬리'라는 의미이다. 뾰족하게 둘로 갈라진 정상이 물고기 꼬리를 닮았다. 정상으로 갈수록 점점 가까워져 오며 이정표가 되어줌.
하룻밤 묵게 된 고레빠니 마을. 안나푸르나 속 마을 중 제법 큰 규모이다. 중간에 서 있는 작은 스투파도 귀엽다. (스투파: 네팔이나 인도 여행 중 자주 발견하게 되는 탑. 부처와 성현의 유골을 모는 탑이라고 한다. 크기는 다양)
고레빠니 숙소의 방에서 바라본 풍경
멀리 보이는 설산
산행 중에는 해가 일찍 지기도 하고, 갑자기 고도를 높이면 고산증이 오거나 몸에 무리가 가해질 수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걸었다 싶으면 롯지(lodge)를 잡는다. 짐을 풀고 씻은 후 밀크티 한잔 마시며 몸을 녹이며 책을 읽거나 메모를 쓰기도 한다. 산속에서는 자연의 흐름에 맞춰 생체리듬이 맞춰진다. 해가 지기 전 취침하고, 동이 틀 때쯤 눈을 뜬다. 노곤 노곤한 상태로 침대 위에 누우면, 좁고 허름하지만 그래도 이 거대한 산자락에 내 한 몸 뉘일 곳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이구나 싶다.
돌계단 틈에 핀 보라색 꽃.. 내가 좋아하는 색과 모양을 지닌 꽃.
연약해 보이지만, 돌 틈 사이를 뚫고 피어나 몸을 지탱하고 있는 강인함이 마음과 눈길을 끈다.
산행 중 백발이 성성한 노인분들도 자주 마주치게 된다. 체력도 체력이지만, 마음도 건강해야 가능한 일이 아닐까? 나도 나이 들어서도 내 두발로 땅을 오래오래 밟을 수 있도록 체력과 정신을 건강하게 유지하고 싶다.
마차푸차레 가는 길
마차푸차레 가는 길. 여기서부터는 길도 험준해지고 공기도 차가워짐을 느낀다.
마차푸차레의 롯지. 가지고 있는 옷을 다 껴입고 양말을 두세 겹 신고 자도 너무 추웠다.
마차푸차레 석양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4130미터)
아침 ABC(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까지 올라가는 길은 힘겨웠다. 아무래도 고도도 높고 바람도 세니 이전과 다르게 발걸음이 무겁게 내디뎌진다. 산 아래서부터 매일매일 걸으며 바라보던 모든 산들이 집결하여 사방으로 둘러싸여 있다. 거대한 설산 앞에 서니 오욕칠정(五慾七情)이 다 씻겨져 내려가는 듯하다. 희(喜), 노(怒), 애(哀), 락(樂), 오(惡), 욕(欲), 애(愛)... 나를 괴롭혔던 모든 감정이 산 앞에서 무의미하게 느껴지고, 이 순간만큼은 부질없는 집착에서 벗어나는 느낌이다.
내게는 산도 산이지만, ABC 가는 길에 펼쳐진 초원이 더 마음에 든다. 하산길에 뒤를 돌아 풍경을 음미한다.
햇살에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나는 융단을 보는 듯하다. 거대한 설산으로 압도된 차가운 풍경을 따뜻하게 녹여주는 풍경이다.
ABC에서 시간을 가진 후 MBC 숙소에 들러 짐을 챙겨 하산을 시작한다. 해냈다는 뿌듯함과 이제는 지긋지긋한 추위와 안녕이라는 생각에 후련함이 교차한다. 신기한 것은 내려갈 때의 길이 올라갈 때의 길과 똑같은 강과 바위로 이루어진 길이고 오르락내리락 반복되는 것도 똑같은데, 전날 올라갈 때 험준하게 느껴졌던 길이 내려갈 때는 평화롭고 아늑하게 느껴진다. 사람 심리에 따라 이렇게 보이는 것도 다르구나 싶다.
하산하는 중에 촘롱으로 가는 길. 긴 오르막 구간으로 ABC 3대 난코스 중 하나이다.
긴 계단을 다 올랐다 생각하면 또 나타나는 긴 계단. 계단 앞에서 허거걱하게 된다.
이럴 때는 계단 전체를 멀리 보지 말고, 내 발 바로 앞에 놓인 한 계단, 한 계단만 보는 것이 힘이 덜 드는 방법이다. 우리는 흔히 '멀리 보라, 전체를 보라'라고 하는데, 때로는 바로 앞에 놓인 것만 보는 것이 필요할 때도 있다. 멀리 보기만 하면, 그 끝없는 아득함에 금방 지치거나 쉽게 포기할 수 있다. 전체 큰 목표를 염두에 두되, 내 바로 앞에 놓인 작은 목표에 초점을 맞추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다 보면 결국에 그 목표에 도달하게 된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또는 어떤 일을 할 때, 카메라의 줌렌즈처럼 초점거리를 자유자재로 조절하여 때로는 멀리도 보되, 필요할 때는 줌을 당겨 가까이 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아득한 계단을 한 걸음 한 걸음 걸으면서 생각해 본다. 그리고 덧붙여 떠오르는 우리 엄마의 명언, 집에서 엄마가 가끔 마늘을 깔 때, 내가 '이거 언제 다까?'라고 불평하면, 엄마가 늘 하는 말. "눈은 게을러도 손은 부지런하다."
이 날 내 눈은 게을렀지만, 발은 부지런했다.
산 아래로 내려올수록 따뜻하고 포근한 풍경과 만나게 된다. 마음을 일렁이게 하는 꽃나무도 보이고, 햇빛을 받아 윤이 나는 연둣빛의 계단식 밭도 보이고, 연인과 다정하게 데이트하고 싶은 오솔길도 나타난다.
추위와 고단함을 이기며 여정을 마무리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꿀맛 같은 보상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