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불현듯 두 단어가 내 머리를 탁! 치고 들어왔다.
'관계'와 '과정'
이 단어를 파바박 떠오르게 한 특정한 사건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추측컨대 내 삶이 꽤 만족스럽고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 튀어나온 단어인 것 같다. 그렇다고 삶이 대단히 잘 굴러가고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삐걱대는 부분도 있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영역도 있고, 대단한 성취를 이룬 것도 아니고, 불안한 요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은 평화로웠다. 예전 같으면 문득문득 불안이 스멀스멀 올라왔을 것이다. 뭔가를 하고 있으면서도 가시적인 성과나 성취가 보이지 않으면 스스로에게 화가 나고 저만치 달아나 있는 다른 사람들을 보며 비교하며 우울해졌을 것이다.
장기여행에서의 배움과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변화한 관점 덕분인지 '인생은 이 세상에 와서 한바탕 놀고 가는 여행'이라는 생각이 점점 강화되었다. 여기서 '놀고 간다'는 것은 흥청망청 즐긴다, 또는 세간에 왜곡되어 쓰이는 욜로(YOLO) 같은 것이 아니라 내 삶을 경험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는 것이다.
여행에서는 맞닥뜨리는 모든 일이 경험이 된다. 낯선 풍경 바라보기, 미술관이나 박물관 방문하기, 책에서만 보던 유적지 방문하기, 문화 체험을 포함한 각종 액티비티, 그리고 다른 문화의 사람들과의 만남 등 모든 것이 경험이다. 그것들을 통해 무엇을 달성하겠다든지 성공하겠다든지 그런 목표보다는 대체로는 경험하면서 느끼는 즐거움과 배움이 그런 경험의 주된 목적이 된다.
삶이 여행이라는 차원에서 삶을 경험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어떨까란 생각이 들었다. 생각이 들었다기보다 시나브로 그렇게 바라보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이리저리 재거나 고민하기보다는 실제로 경험하고 실행하는 것에 더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더 나아가 오랫동안 천착했던 삶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탐구도 그만두었다. 경험하는 순간은 '지금-여기 (Here & Now)'에서 이루어진다. 과거와 미래는 평가와 예측이 개입된 시간이다. 경험하는 찰나의 순간에는 이런 요소가 개입되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통제하고 싶어 하지만 삶 전체를 통제하거나 조절할 수는 없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전체 인생이 아니라 지금-여기 (Here & Now) 밖에 없지 않나 싶다. 인생이란 이 지금-여기 (Here & Now)라는 점들이 이어지는 것일 뿐이다.
이런 관점을 바탕으로 살다 보니, 지금- 여기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어떤 목표 달성이나 성취가 아니라 '관계와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목표의 달성과 성취도 중요하다. 하지만 이런 결과는 순간순간 나의 성실하고 진지한 경험과 일종의 운이 결합되어 따라오는 부산물이지 경험하는 것의 실체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지금 - 여기에 집중하다 보면 내가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와 지금 하고 있는 일의 과정만이 전부이다. 그러면 크게 두려울 것도 크게 욕심나는 것도 없다. 그저 내가 경험하고 있는 관계와 과정에서 얻는 즐거움과 배움에 감사하고 만족하게 된다. 결과가 좋을 때도 있지만, 좋지 않을 때도 관계와 과정에서의 배움은 오롯이 내 것이 되어 남아있다. 그렇다고 유유자적 사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내가 해 보고 싶었던 것에 더 열심히 도전하고, 내가 맡은 일에 더 열정적으로 임하게 되며, 나와 관계 맺는 사람들에게 더 집중하게 된다.
불현듯 내가 뭐 하고 있나라며 불안하거나 조급해지는 순간 또는 역경에 처했을 때 이 삶의 철학을 떠올리면 마음이 고요해지며 안정된다. 그리고 안개 같이 앞이 보이지 않는 때에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