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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질체력 이슈

by 서유현


스물다섯 전까지 나는 밖에서 에너지를 모아 오는 사람이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나가서 사람을 만나고

아주 농축된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오늘도 조금 더 누군가와 가까워졌다는 생각에 행복했다.


스물 다섯 겨울이 시작될 때쯤,


별것도 아닌 어느 날, 거실 복도에 있는 협탁 위에 엄마가 여행에서 사 온 낙타 인형을 바라보며 고민 중이었다. 그렇게 친하진 않지만 참 괜찮은 친구랑 단둘이 만나기로 했던 날이었다. 그 친구와 단둘이 만나는 일은 처음이었는데 더 알아가고 싶은 마음에 약속을 잡았다.

그런데 아침부터 집 밖을 나가기 싫었다. 저녁, 강남역까지 나가야 하는데 아무래도 정말 나가고 싶지가 않았다. 반나절을 고민하고서 해가 뉘엿뉘엿 질 때쯤이 돼서야 이야기했다.

‘몸이 안 좋아서 아무래도 오늘 못 만날 것 같아. 미안해.’


그렇게 그날 저녁 집에서 아무 일 없는 조용한 시간을 보내고 말았다.

그때부터였다. 사람을 만나는 일에 급격히 심정이 위축되었던 것이.


한 시간 반씩 지하철을 타고 오가며 친구들 선배들 만나는 일을 밥 먹는 것보다 많이 했던 내가

내 방 침대를 두고 바닥에 누워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음을 더욱 명확히 하기를 원했다.

바닥에 누워 우리 집 강아지 이름을 부르면 거실에서부터 뽈뽈 다가오는 강아지를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했다. 누군가를 만나는 것에 기가 빨린다고 느끼게 되었다. 사람이 싫어진 건 아니었는데 그건 정말 아닌데 사람을 많이 만날 수가 없었다.





그로부터 16년이 지난 오늘도 나는

이번 달에 하나둘씩 잡혀가는 약속들을 보며 좋은 듯하다가도 과연 나는 괜찮을 것인가 염려한다.

며칠 전엔 갑자기 몸이 너무 안 좋아서 생존을 위해 정신력으로 병원에 걸어가 수액을 맞았다.

지금은 외부연료가 아니면 내 안에 힘을 낼 연료가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에 자진해서 팔을 내밀었다.


죄책감을 가진 날들도 많았다.

일을 그만두고 집에서 아이를 돌보기로 하면서 아이를 가까스로 원에 보내고 난 뒤 아이가 하교를 할 때까지의 시간 동안 나는 소파에 누웠다. 무언가 마음에 걸려 침대에 눕지도 못했다. 시간을 헛되게 쓰는 것이 죄처럼 느껴졌다.

샤워를 하고 나와 머리를 말리지도 못한 채 샤워가운을 입고 기절하듯 잠들기도 했다.

아주 기본적으로 내가 해야 할 일들은 했지만 능동적으로 일을 만든 적이 없었다.

게을러 보이는 내 모습이 분기마다 한 번씩 죄책감을 일으켰다.


잡은 약속은 수행했지만 집으로 돌아오면 피로가 쌓인 게 느껴졌다.

집 밖으로 나가면 나의 에너지가 방전되는 속도가 제곱은 되는 것 같았다.


엄마도 나를 키우는 동안 자주 아팠고 낮에 누워있는 시간이 많았다. 그런 엄마가 답답했는데 그런 내가 되었다. 저질체력도 내 일부라는 것을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러다 이제야 저질체력은 죄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는 럭키 하게 건강체질로 태어나지만 누군가는 그렇지 못할 수도 있잖아.


남편은 결혼해서 한동안 나의 저질체력을 이해하지 못했다. 의지박약에 가깝게 해석했다. 그런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나는 모르지만 누군가는 아침에 눈이 떠질 때 머리가 무겁지 않은지도 모른다.

일어나자마자 몸을 바삐 움직이는 것이 큰 노력 없이 할 수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는 새벽부터 바삐 움직이지 않으면 이 집이 하나도 돌아가지 않아서 몸이 움츠러드는지 어쩐 지도 인식할 틈 없는 채로 하루를 시작할런지도 모른다. 대낮에 까무러지는 이유가 게을러서가 아니라 충전하기 위함인지도 모른다. 잦은 충전을 통해 하루를 조금은 더 온전하게 살아내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는 정말 저질체력이 맞다.


몸에 에너지가 적은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에너지를 적절히 쓰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하루에 하나의 약속만 잡는다던지, 여행이 예정되어 있다면 일주일 전부터는 큰 일정은 잡지 않는다던지,

오후에 중요한 일이 있다면 오전은 최대한 따뜻한 곳에서 얌전하게 보낸다던지 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생존을 위해 터득한 나만의 체력 분배 방식인 것이다.


적은 에너지에 지쳐 한 달쯤 아르기닌을 복용했다.

나도 힘만 난다면! 나도 신바람 나는 매일매일! 보내고 싶었다.

아르기닌은 저질체력을 길게 늘여 저전력모드로 쓰는 기분을 들게 했다.

만나고 싶은 친구를 만났는데도 너무 반가운데도 텐션이 오르지를 않았다.

손가락이 조금 저릿저릿한 기분이 들었다.


오늘도 창문이 보이는 쪽에 머리를 두고 소파에 눕는다. 평화롭다.

하루가 길고 해야 할 일이 떠오르지만 머리로만 시뮬레이션을 돌려본다.

조금만 쉬다가 곧 모두 처리해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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