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만에 책방 정리였다.
정리랄 것 도 없는 게 버려야 할 책들이 우수수 쏟아졌다.
아이가 너무 잘 봤지만 7살 때부터 4년 이상 본 귀여운 수준의 전집-이걸 아직도 가끔 꺼내본다는 게 함정-
생각보다 한번 보고는 읽지 않는 학습만화들, 그리고 지난 몇 년 간 애쓴 문제집과 교과서들.
하지만 고민이 되는 부분도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책들 몇 권, 대학원 전공시절 관련 서적으로 접했던 고전들-뭔가 위대해-, 버리고 싶지 않은 책들이 그동안의 정리 고비에도 남겨져있었다. 하지만 뒤돌아보니 수년간 꺼낸 적도 없는 책들이었다.
다 버려야겠다.
책은 역시 무게가 압도적이다. 빨간색 노끈을 꺼내 케이크박스 위의 리본테이프처럼 십자가모양으로 묶어냈다. 너무 많은 책을 한 번에 묶으면 내가 들 수 없으니까 적당량만.
그리고 야심 차게 당근을 시작했다.
나는 그 시장의 가격파괴자. 시세를 쭉 보는데 같은 물건이 너무 많이 나와있었다. 이 전집은 거래가 상당히 활발한가? 싶어서 보면 꽤 오래전부터 당근에 나와있던 물건들도 많았다. 나는 버릴 수도 있는 거니 팔겠다는 마음으로 엄청난 가격제안을 했다.
3초가 걸리지 않았다. 3명이 메시지를 보냈다. 이래 봬도 공정함을 좋아한다. 첫 번째 메시지에 답장을 하고 두 번째 메시지에는 거절을 했다. 세 번째 메시지는 좀 독특했다.
'제가 이미 진행 중이라서요. 죄송합니다.'
라고 보냈더니
'제가 2만 원 더 드릴 테니 저한테 파시면 안 될까요?'
라고 답장이 왔다.
아, 이렇게 할 수도 있구나. 처음 알았다. 당근에 널려있는 같은 제목의 전집들(물론 상태는 좀 다르겠지만)이 이렇게나 많은데 다른 사람이랑 거래하기로 한 것을 2만 원 더 줄 테니 팔라는 말이 편하지는 않았다.
'거래가 깨지면 연락드릴게요.'
'네. 꼭 연락 주세요.'
나는 예정대로 첫 번째 메시지를 준 분과 거래를 하기로 했다. 원래 가격에.
이 거래가 깨진다고 한들 두 번째 메시지를 준 분에게 거래를 하기로 했었다.
2만 원을 더 준다는 거래자는 세 번째 메시지를 보낸 분이었기에 거래가 일어날 확률은 없는 거나 다름없다.
그게 나의 룰이었다.
3시간쯤 지났을까. 이상하게 잠이 안 와 새벽까지 뒤척이고 있는데 당근알림이 울렸다.
오늘 여러 가지를 당근에 올려놓은 탓이지.
아까 그 세 번째로 메시지를 주신 분이었다. 내가 올린 학습만화도, 문학책도 같이 살 테니 아까 그 책을 자신한테 팔라는 메시지였다.
왜?
하필이면 나랑 코드가 잘 맞으셨나 보다. 또 다른 문학책을 사려고 봤는데 또 내가 올린 거였나 보다. '내가 올린 게 다 마음에 드셨구나.'라고 생각하려고 했다. 근데 느낌은 그렇지는 않았다.
계산적으로 생각하면 내가 올린 책들을 다 팔아버릴 수 있어서 이득이었다. 그런데 내가 가격을 파괴한 사람이긴 하지만 이건 그 이상을 파괴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당근마켓이 아니라 당근경매네 이건. 유사한 앱으로는 '헤이딜러'가 있다고 알려드려야겠다.
이런 거래를 즐기시는 분이 있다면 그분의 서타일을 존중하겠다.
다만 이건 내 거래니까 이렇게는 안 하겠다.
'거래가 깨지면 연락드리겠습니다.' 했다.
자본주의라는 것이 태초에 하늘이 있었더라~처럼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 아닌데.
사람들이 이렇게 저렇게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체제라면
나는 그 체제를 충분히 이용하고 이득을 누리는 것이 옳은 방법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최근에야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아무도 보지 않아도 대쪽같이 사는 삶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었다.
도덕적인 부분에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도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럼에도 나에게 최고의 이득을 남겨주는 이 장면에서 내가 왜 고민을?
마음을 바꿔서 가장 많은 이득을 주는 사람과 거래를 하는 것이 자유시장경제 아닌가?
첫 번째 메시지를 준 분과 무사히 거래를 마쳤다.
다정한 거래였다.
책아. 우리 집에서 냉대받았지만 그 집 가서 사랑받으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