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어서, 나는, 계절 옷을 늦게 갈아입는 편이었다. 그러니까, 초여름까지 봄옷을, 초겨울까지 가을 옷을 입는 식이다. 그건 좀 이상한 일이었다. 옷과 관련된 행태와는 반대로, 난 계절이 바뀌고 있다는 걸 그 누구보다 빨리 알아채곤 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겨울 끝자락에 이미 봄이 오고 있음을, 가을이 저물 무렵 벌써 겨울이 와버렸음을 민감하게 느낀 것이다. 가수 정수라가 '뚜렷한 사계절이 있어' 좋다는 노래를 부를 때, 난 사실, 그 말에 전혀 동의할 수가 없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내 마음은 늘 몸살을 앓았기 때문이다. 흔히 특정 계절을 두고 '가을을 탄다'는 말을 꺼내곤 하는데, 난, 계절이 몸을 바꿀 때마다 마음에 문제가 생겼다.
그건 좋은 일이 아니었다. 사계절을 좋아한 가수의 노랫말과 달리, 사실 계절은 뚜렷이 구분되는 시기보다 몸을 바꾸는 '변태'의 시기가 더욱 길기 때문이다. 적어도 난, 그렇게 느꼈다. 그러니 사실상 난, 1년 내내 마음이 일렁였다고 봐야 하는 셈이다. 그러다 보니, 술을 마실 핑계도 많았다. 술만 마셨다 하면 여름이고 겨울이고 길바닥에 잘도 눕는 형 때문에, 대학에 들어가서도 결코 술 따위 마시지 않겠다던 나는, 결국 술을 마셨다. 다만, 길바닥에 눕지 않고, 어떤 일이 있어도 방바닥에 누워 잤다. 술 먹고 방바닥에서 잤다는 게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니다. 아무튼, 내 마음은, 늘 계절의 바람을 따라 그렇게 끊임없이 요동쳤다. 계절 옷을 늦게 꺼내 입은 건, 어쩌면 그런 이유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다음 계절의 햇살과 바람과 습기를 너무 빨리 알아채서, 그에 대한 반동으로, 희미해져 가는 계절의 끝자락을 붙잡아두고 싶었던 건 아닐까. 말도 안 되는 궤변일 수도 있다. 그저, 너무 게을러서, 옷을 바꿔 입는 걸 미룬 것뿐인지도 모른다.
삶의 계절이 흘러갈 때에도, 난 그다지 기민하게 옷을 갈아입으며 변화된 날씨에 대처해 나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건, 진짜 옷을 갈아입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난 우물 속을 들여다보느라, 내 삶이 계속 흘러가고 있다는 걸 주의 깊게 살피지 않았다. 사람들이 길을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저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 저이는 제 갈 길을 가는구나' 중얼거릴 뿐이었다. 그러다 문득, 여름날이 시작된 지 한참 지났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러나, 봄날, 내 삶의 밭에 무엇을 심었는지 잘 생각나지 않았다. 아니, 무엇을 심기는커녕, 밭 준비가 되어 있었던 건지, 거름은 뿌렸는지, 흙을 갈기는 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계절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게다가 내 삶의 계절에, 내년은 없었다. 봄은 끝난 지 오래되었고, 여름날을 관통하고 있었으며, 저기 어디쯤 가을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밭에서 자라난 것들은, 봄에 정성껏 심긴 작물이 아니라, 잡초들과 함께 아무렇게나 자란, 그 무엇이었다. 그래서 내가 여름날이 되어버린 것을 알고 해야 할 일은, 부지런히 잡초를 뽑고, 먹을 수 있는 것들이 죽지 않게 애써 살려내는 거였다. 봄부터 부지런히 김을 매지 않은 밭의 잡초를 이겨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봄부터 아낌없는 자원과 노력을 투여하며 길러낸 것이 아닌, 그저 아무렇게나 뿌려져, 어떻게든 뿌리내려 살아내고 있는 작물을 지켜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살다 보면, 결코 쉬이 살지 않았는데도, 결코 밭을 떠난 적 없는데도, 가을날에 거둘 결실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되돌아보면, 사실, 제때에 옷을 갈아입지 못한 것이 아니라, 늘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듯도 했다. 삶이라는 것이, 내게 맞지 않는 옷처럼 느껴졌다. 어느 날은 너무 헐거워 내가 부유하는 듯했고, 어느 날은 너무 조여와 내가 매장되어 있는 듯했다. 젊은 날의 그 마음이 우울증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설령 그와 비슷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난 의학적으로 진단되는 어떤 이름을, 불신하는 편이다. 물론 의학의 이름으로 목숨을 건지는 이들도 있겠지만(몸의 의미에서든 마음의 의미에서든), 다른 한편에서는 의학적 진단의 이름으로 병적인 상태에 갇혀 지내는 이들도 있다. 난 누이가 후자에 가까웠다고 믿는다. 그이는 늪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이 그다지 없었다. 거길 벗어나는 순간, 자신을 병들게 한 시간을 보상받을 길이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신이 상처받은 시간을, 없던 일로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어쨌든 나는, 우울'증'은 아니었겠지만, 어둔 마음을 끌어안고, 삶이라는 것이 어디 다른 곳에 걸린 옷인 것처럼, 가끔 몸에 걸쳐는 보지만 도무지 맞이 않는 옷인 것처럼, 거울에 비춰봐도 내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남의 옷인 것처럼, 낯설어했다. 그리고 낯선 그 마음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크게 나아지지 않은 듯하다. 가끔, 탄식하듯, 혼잣말을 하곤 한다. "아... 지겹다..." 여름날이 끝났을 때, 내게 남은 건, 그 낯섦을 기어코 견뎌야 하는, 계속 살아내야 하는 일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물론 그건, 내가 가장 잘 해낼 수 있는 일이다.
누군가 그랬다. 철 아닌 때에 피는 꽃은 얼마나 처연한가. 그 말에 마음이 한없이 내려앉았다가, 며칠을 그러다가, 며칠을 그 마음에 서글퍼하다가, 문득 생각했다. 제철에, 꽃이 핀 적 있던가. 난, 꽃 핀 적 없는 식물이었다. 봄에 아무렇게나 뿌려져 잡초와 함께 자란 식물이었고, 그 어떤 꿀벌도 내려앉지 않는, 그저 계절마다 바뀌는 바람의 방향에 스산하게 흔들리는, 간신히 뿌리내린 식물이었다. 한때, 나무가 되고 싶었던 적 있었던가. 잘 모르겠다. 그러니, 차라리, 철 아닌 때에라도, 잠시 꽃 핀 식물이 되어도 좋겠다 생각한다. 가을날에 피어, 찰나에 하늘거리다가, 이내 시들어, 꽝꽝 얼어붙어, 계절을 마감해도 좋겠다 생각한다. 어차피 삶의 계절에 내년 봄은 없으므로, 여름날은 갔으므로, 꽃 피는 시절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므로, 차라리, 철 아닌 때에 피는 처연한 꽃이 되어보는 것도 괜찮겠다. 어차피, 내게 삶이란 낯선 것이었으니, 나는 삶의 변종이었으니, 나는 죽음이었으니.
추수가 끝난, 가을이 겨울로 향해 가는 지금, 날마다 바람이 거세어지는 오늘, 태양이 떠오른다는 것이 참으로 낯설게 느껴진다. 보라,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 당신은, 아름다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