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이 법이라서,

어차피 더 살아야 하는 참이라서,

by 식목제

출판사를 하는 후배가 말했다. 사실 후배라고 하기에는, 잘 알지 못하는 사이지만, 그저 나보다 나이가 조금 적다는 이유로, 그저 나보다 출판 일을 조금 늦게 시작했다는 이유로, 얄팍하게 후배라 단정지은 그이가, 아무튼 말했다. 군인을 남편으로 둔, 그이의 '진짜' 후배가 다른 지역으로 이주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을 몇 번 본 적 있다. 젊어 문학도였다는 그는, 작가의 길을 포기한 것인지, 잠시 접어둔 것인지, 그 스스로도 알지 못한 채, 아이를 키우며 가족을 돌보고 있었다. 출판사를 하는 후배,라고 혼자 단정지은 이에게 말했다. 안타깝다. 재능을 꽃피우지 못한 채, 그렇게 살림만 하고 살아야 하다니. 자존감이 무척 낮아진 것처럼 보이던데. 맞아요, 선배. 대학 입학할 때, 소설을 너무 잘 써서 두각을 나타낸 친구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자존감이 바닥인 것 같아요. 아무튼 선배, 그 친구 이사 가기 전에 언제 한번 같이 밥이나 먹어요. 그래, 연락해.


자존감이 바닥을 치지는 않았지만, 삶이 구질구질한 나는, 작가가 될 재능이 있었으나, 군인의 아내가 되어, 아이를 키우며, 시어머니 등쌀에 마음고생을 하고 사는, 작가가 되었다면 군인인 남편보다 더 근사한 아우라를 풍겼을, 그 사람을 생각했다. 그 사람의 선한 웃음을 떠올리던 나는, 지구에서, 누구의 아내로 살지 않아 다행이라는, 참으로 괴이하면서도, 매우 근거 있고 합리적인 생각을 하다가, 누구의 아내가 아니면서도, 전혀 근사한 아우라를 풍기지 못하는, 늘 내일의 밥그릇이나 걱정하고, 자본주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고양이에게 공연히 짜증이나 내는, 너 때문에 망가진 자동차를 어찌하면 좋으냐고, 누구에게는 푼돈일 수리비를 근심하는, 내가 구질구질하게 느껴져서, 내일은 비가 오면 좋겠다고 중얼거린다.


다행히도, 주말에 비가 온다는데, 비가 오고 나면 추워진다는데, 그럼, 구질구질한 때를 벗기고, 얼어 죽는 것도 괜찮겠다 생각하다가, 선배, 금요일이나 주말쯤 자리를 한번 마련할게요, 하던, 함부로 후배라 단정지은 이의 말이 떠올랐다. 아, 밥은 먹어야겠다. 그리고, 바다도 있고, 산도 있고, 호수도 있고, 들도 있는, 여기서, 글을 쓰며 재능이 만개하면 좋으련만, 이주를 해서 그저 군인의 아내로 살아가야 하는 그 사람의 얼굴도 한 번은 더 보고 싶다 생각했다. 쓰잘머리 없는 격려도, 위로도 하지 않을 거다. 어쭙잖은 조언도, 충고도 하지 않을 거다. 그저, 밥이 법인 세상이니, 함께 즐거이 밥을 먹어 법을 채우자. 하긴, 아직 얼어 죽을 정도로 추운 날은 아니라서, 어차피 더 살아야 하는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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