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소리도 요란한 어느 날

문득 우산을 만지작거린다

by 식목제

2016년에 나온 허수경의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를 이제야 구입했다. 오랫동안 새로 얼굴을 내미는 시집을 사지 않았다. 정확히는, 오랜 시간 동안 시를 읽지 않았다. 그저 책장에 있는, 젊은 시절에 읽던, 낡은 시집을 꺼내 가끔 들춰보는 게 다였다. 시를 읽을 수 없었다. 시를 읽으면, 마음이 여전히 우물 밑바닥으로 가라앉는 것이, 여전히 빈 들판 한가운데서 찬바람을 맞는 것이, 여전히 빗속을 하릴없이 걷는 것이, 그런데, 그것이 싫지 않은 것이, 싫었던 것이다. 아, 난, 어쩌면, 아무런 감정도 없이 빨리 낡아버리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온라인 서점에서, 아직 읽지 못한 시집을 사고 싶어 장바구니에 한가득 담아 놓고는 결국 구입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지역에 새로 생긴 작은 서점에서 그이의 시집을 만나고 만 것이다. ‘북끝서점’이라는, 이름이 예쁘기도 한, 작은 서점이 생겼다. 점심나절, 직원들과 근처에서 밥을 먹고 잠깐 들렀다가, 서점 주인장이 큐레이션해놓은 시집 코너에서 그 시집을 만나고는, 이건 운명이다 싶어, 냉큼 사고 말았다.


이제는 가버린 그이의 시집을 읽다가, 아직은 존재했던 때 그이가 써 내려간 시집을 읽다가, 난 문득 시인의 유고집 《가기 전에 쓰는 글들》에서 봤던 문구가 떠올랐다. 그 문장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젊은 날 내가 왜 시집을 품에 안고 살았는지, 이후 오랜 시간 동안 내가 왜 시를 품에 안을 수 없었는지, 오랜만에 그이의 시를 읽자마자 왜 이토록 안절부절못하는지, 다 말해주는 문장이기 때문이다.


시간을 정확하게 해체할 수 없는 순간에 시는 온다. 어떤 시간을 정확하게 정의할 수 없는 그 망설임의 순간에 시는 오는 것이다.


시란 그런 것이었다. 그런 까닭에, 시는 단숨에 읽고, 단숨에 카타르시스를 얻을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나는, 불가해한 마음과 생각과 감정의 미로를 헤매며, 시점도 끝점도 없는, 정의할 수 없는 시간을 더듬으며, 시를 읽고, 시에게 나를 읽어달라 했던 것이다. 며칠째 비가 내렸다. 어둔 빗소리에 펼친 그이의 시집에서 만난 시는, 아, 그이의 시는, 왜 이제야 이 시집을 집어 들게 되었는지 알 것만 같은……. 빗소리도 요란한 어느 날, 문득 우산을 만지작거린다.



우산을 만지작거리며 _ 허수경


우산을 만지작거리며 아무 데도 가지 않았다 삶과 연애 중이라고 생각하라고 심리상담사는 말했다 우산을 만지작거리며 나가볼까 생각한다 생계를 위해서라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먹는 것보다 자는 것이 중요하다고 심리상담사는 말했다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더라면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가끔 심리상담사를 죽이는 꿈을 꾸다가 그가 내 얼굴을 달고 있는 장면에서 꼭 잠을 깬다 내 얼굴을 향하여 내가 칼을 들이밀고 있었으므로


그때 그 어느 날 심리상담사에게 죽은 허 씨에게, 라고 시작되는 편지를 보여주지 말아야 했다 얼어죽은 국회의원에게, 라는 편지도 맞아 죽은 은행에게, 우주로 납치된 악몽에게, 달에 있는 나의 거대한 저택에게, 라고 시작되는 편지도 어떤 편지도, 아니 내가 끊임없이 편지를 쓰는 식물이라고 고백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나는 동물의 말을 하는 식물입니다

나는 희망의 말을 하는 신입니다

나는 유곽의 말을 하는 관공서입니다

나는 시계의 말을 하는 시간입니다

나는 개가 꾸는 꿈입니다

등등의 고백도 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하지만 고백하고 말았다(물론 나는 그걸 강제된 고백이라고 부르고 싶기는 하다) 나라는 나쁜 인간을 방어할 무기가 나에게는 필요하다 나를 공허하게 버려줄 무기가 너에게는 필요하다


우산을 만지작거리며 오늘 오후에 있는 그와의 약속을 생각한다 불투명한 유리가 끼워진 대기실도 대기실에 붙여둔 자살 위험이 있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특징에 대해서도 내가 읽어보면 그들은 다 살지 못해서 안달한 사람인데 심리상담사의 꼬임 혹은 그의 인턴이 건네주던 하얀 줄이 박힌 푸른 사탕 때문에 나처럼 고백을 한 사람들일 뿐인데


우산을 만지작거리며

나는 웃는다 울 일이 없어서 심란한 아이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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