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지겨운 것이지만,

우리는 서로를 안아줄 수 있으니,

by 식목제

생각해보니, 내가 독백과도 같은 글을 쓰는 건, 단절된 채, 유폐된 채 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내가 나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이렇게 오래 살다 보면, 사는 일이 정말 지겨워지기는 한다. 세상과 완전히 연을 끊지도 못한 채, 어정쩡하게 한 발 걸치고 있어야 하는데, 이는 순전히 자본주의의 시민으로 살아가야 하는, 그래야 할 만한 책무가 남아 있기 때문이지, 다른 그럴듯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한 해가 끝나갈 때마다, 지겨움이 더욱 지겨워지는 건, 그저 다음 해가 또 시작되리라는, 그리하여 이토록 지겨운 삶을 더 살아내야 한다는, 단순한 사실을, 더욱 또렷이 인지하게 되기 때문이다.


난, 살아 있어서 밥을 먹어야 하고, 밥을 먹어야 하기에 살아내야 하는, 기괴한 뫼비우스의 띠를 돌고 또 돌아야 한다. 뫼비우스의 띠가 끊어지기 전까지 말이다. 스스로 그 띠를 잘라버리지는 못할 것이다. 난, 그래야 할 정도로 내 삶을 아끼지 않는다. 자기 존재를 사랑하는 자만이, 자기 존재를 증오할 수 있다. 단절된 채 산 데는 별다른, 철학적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삶도, 세상도, 사람도 지겨웠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일찍이 절멸하지 못한 건, 다시 말하지만, 그럴 만큼 나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살아야 했다. 독백은 살기 위한 방편이었다. 나 자신과 이야기 나눌 때는 시간, 존재, 우주와의 연결을 붙잡고 있는 것이 중요했다. 이는 지겹고 무의미한 삶을 이어가야 할, 조금은 거창하지만, 우주적인 이유를 내게 안겨주기 때문이다.


물론 우주의 한 점을 다시 무한대의 픽셀로 나눈 존재로 돌아오면, 현실은 비루하고, 삶은 무례하다. 1년짜리 계약이 끝나고, 재계약이 되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를 남을 통해 들었다. 우연한 일이었다. 조직 내의 다른 기간제 근로자들에게 자신들은 재계약 통보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마침, 주말 프로그램을 운영하러 온 외부 기획자에게 말했다. 재계약이 되고 싶다는 게 아니라, 왜 나한테는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이다. 그제야 그이가 말한다. 실은 얼마 전 조직 팀장에게, 나는 재계약이 되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사실, 사회생활을 많이 해보지 못한, 철없고 젊은 팀장의 잘못이 아니다. 그이가 뭘 알겠는가. 문제는, 입사 때부터 무례했던 책임자와 총책임자다. 조직에 들어올 당시, 젊은 팀장이 나의 채용을 강력히 반대했다는, 불필요한 말을 전한 책임자와, 아무런 맥락도 없이 내 면전에 대고 가장 ‘하찮은’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말한 총책임자는, 나가는 사람에게조차 일관되게 무례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총책임자는 문화예술 업계에서 꽤 오래 일한 사람인데, 툭하면 자신의 웹 채널에서 ‘다양성, 환대’ 같은 ‘용어’를 사용한다. 정확히 말하면 ‘비즈니스용 용어’다. 그이의 실제 삶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책에서 그 용어들을 배운 모양인데, 나도 그 책을 안다. 하지만 그가 책에 담긴 내용과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솔직히 말하면, 잘 모르는 듯하다. 그저 그럴싸한 ‘용어’만 차용해 ‘비즈니스’에 쓰고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도 하나의 픽셀에 불과하다는 것을 모른다. 픽셀 차원까지 갈 필요도 없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 역시 노동자라는 걸 잊는다. 난 예전부터 노동자에게 무례한 노동자가, 노동자를 억압하는 노동자가, 관리자나 경영자를 비난하는 걸 매우 비판적으로 보는 편이었다. 그런 노동자가 관리자나 경영자가 되었을 때, 자신이 비난한 자들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될 가능성은 제로다. 난 좋은 관리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조금 더 나은 관리자가 되기 위해 애쓰고 살았다. 나처럼, 기간제 근로자로 출판사에 들어왔던 후배가 생각난다. 사장은 그이의 능력을 반신반의했다. 난 그이에게, 지금 이 조직이 나에게 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행동했다. 모든 중요한 정규 회의에 참여시켰고, 그이의 능력에 걸맞은 미션을 수행하게 했으며, 수시로 그이의 훌륭한 수행 능력을 사장에게 보고했다. 그런 다음, 계약 기간이 끝날 즈음에 사장에게 말했다. 아주 능력이 출중한 사람이고, 이제 사장, 당신도 그걸 알 테니, 정규직으로 채용해 달라고.


물론, 내가 조금이라도 더 나은 관리자가 되기 위해 애썼다고 해서, 사장이나 조직원들에게 인정을 받은 것은 아니다. 나 역시,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단점과 약점을 가지고 있고, 그로 인해 언제든지 조직에서 외면당하고 축출당할 수 있다. 본래, 인간사란 그런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더 나은 관리자가 되기 위해 애쓴 행위들을 무의미한 것이라 말할 순 없다.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해 애쓴다는 건, 더 나은 보상을 바란다는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덧붙이고 싶은 말은, 관리자도, 경영자도, 넓은 의미에서 노동자라는 것이다. 당신들도 살기 위해 ‘일하는’ 존재일 뿐이다. 뭐 그리 대단한 존재인 줄 아는가. 게다가, 당신들도 곧 죽어, 썩어 없어질 것이다. 그때 우리의 원자는 뒤섞여, 함께 우주의 먼지가 될 것이다. 난, 그때 당신들의 원자를, 두 팔 벌려 ‘환대’해주겠다.


언젠가, 누군가, 내게, 아까운 사람이라고 말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난 전혀 아까울 게 없는 사람이지만, 그이가 타자를, 존재를 응시하고 안아주는 마음이 고마웠다. 환대란 그런 것이다. 자신의 이익이나 비즈니스를 위해 타자를 ‘쓰는’ 게 아니라, 그렇게 쓰임이 있을 때에만 손을 내미는 게 아니라, 존재를 응시하며 아끼는 마음으로 안아주는 것이다. 그리고, 존재 저 깊은 곳에서부터 타자를 환대할 때, 우리는 굳이 ‘환대’라는 용어를 사용할 필요도 없다. 그저 가만히, 두 팔 벌려, 안아주면 되기 때문이다. 비록 이 말을 듣지 못하겠지만, 내 존재를 응시하고 안아준 그 사람에게 말하고 싶다. 당신도 아까운 사람이라고. 당신의 존재를, 영혼을 두 팔 벌려 안아주고 싶다고. 삶은 지겨운 것이지만, 우리는 서로를 안아줄 수 있다고.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희망이란, 욕망에 대한 그리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