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지독한 몸살을 앓으면서 문득 든 생각. 마음이란, 의식이란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가. 육신의 고통 앞에서 난 너무도 무력한 존재구나. 하지만 또 생각해 보면, 고통이란 육신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 우리는 마음의 고통 앞에서도 한없이 작아지곤 하니까. 삶에서 고통은 피할 수 없는 일.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고통을 잘 알아차리고, 느끼는 일밖에 없구나. 아프다. 때론, 강력한 진통제를, 삶의 모르핀을 원하기도 한다. 부질없는 얘기다. 그건 삶이 허물어진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죽음에 이르기 전날, 모르핀을 처방받았다. 아버지의 전언에 따르면, 아주 편안하고 평온한, 고통 없는 밤을 보냈다고 하는데, 글쎄, 실은 모르핀을 처방받지 않아도 되는 상태로 삶을 마감하는 편이 나았겠지.
설에, 추석에, 무슨 날에, 삶에서 따뜻한 기억의 조각들을 찾아낼 수 있다면 좋을 게다. 쉬운 일은 아니다. 죽은 어미와 일찍 간 형제와 시설에 누워 있는 아비와 마음이 병든 누이를, 어린 나이에 영문도 모른 채 아비를 잃은 조카들을 생각하다 보면, 좀처럼 다정한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이다. 그럴 때면, 만두를 떠올리는 것도 괜찮은 대안이다. 난, 종종, 외할머니의 만두를 기억하곤 한다. 정말, 맛있는 만두였다. 만두를 빚는 날이면, 공연히 마음이 설레져서는 무슨 일이든 도우려 했던 내가 생각난다. 반죽을 치대고, 밀대로 밀고, 동그랗게 잘라, 외할머니가 만든 속을 채워 넣으면, 그렇게 동그랗고 탐나는 만두가 완성되면, 우리는 모두 어서 만두를 맛보고 싶은 기대감에 부풀었다. 난 늘, 빚은 만두를 최종적으로 동그랗게 말아내는 데 어려움을 느끼곤 했다. 그건 어머어마한, 어른들만 할 수 있는, 대단한 기술로 여겨졌다.
오래전, 가끔은, 상상하곤 했다. 형제들이 둘러앉아 만두를 빚고, 어미는 부산스럽게 부엌과 거실을 오가며 오랜만에 만난 자손들에 대한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아비는 자식들이 낳은 자식들에게 장난을 걸며 웃음 짓는 풍경. 지난 삶에서 생겨난 상처와 미움을 털어내고, 화해의 시간을 나누는 풍경. 물론 그런 시간은 오지 않았다. 얼마 전, 모 드라마에서 젊은 아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된장찌개 한 그릇을 남겨두고 숨을 거둔 어미를 끌어안은 채 자기가 원했던 건 엄마와의 화해였다고 말할 때, 난 너무나 많이 울고 말았다. 화해하지 못한 삶. 화해란 그런 것이다. 완전한 이해와 용서가 선행되지 않더라도, 그저 어쩔 수 없었음을, 모자란 존재로 모자란 삶을 살 수밖에 없었음을 인정하고, 그런 서로를 끌어안는 것, 그건 꼭 당신의 잘못인 것만은 아니라고 안아주는 것. 화해에, 다른 전제 조건이란, 없다.
화해하지 못하는 건, 보상받을 길 없는, 자신의 지난 삶과 상처를 헤집기 때문이다. 분명한 건, 지난 삶이란, 돌이킬 수 없다는 것. 이 간단한 진실 앞에서도 우린 무력하다. 내가 여전히 아프다는 걸 알아차리는 데서,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것이다. 그건 마치, 내 무릎을 깨지게 만든, 내 무릎에서 피가 나게 만든 돌부리를 뒤돌아보며, 제 손으로 자기 상처를 다시 뜯어내는 것과 같은 일이다. 가만히 자리 잡을 것 같았던 딱지가 떨어지고, 다시 피가 흐른다. 심지어는 상처가 덧나 더욱 커지고, 고름이 들어차기도 한다. 물론, 뒤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해도, 딱지가 저절로 떨어지고 상처가 아문다 해도, 한 번 다친 무릎은 종종 아플 것이고, 궂은날이면 시큰거릴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다음 여정을 향해 걸어갈 것이고, 그 걸음걸음에 몰두할 때 때론 무릎에 남은 통증을 잊을 것이다. 삶이란, 그런 것이다. 고통이란 계속해서 나를 따라다닐 것임을 알아차리고, 이를 안고 걸어가는 것, 그러다 때로 잊기도 하는 것.
이곳에는 보통 2월이 되어야 큰 눈이 내리는데, 올해는 1월 중순부터 일찌감치 꽤 많은 눈이 내렸다. 그래도, 지난해 2월에 내린 눈에 비하면 적은 양이다. 아마도, 올 겨울이 가기 전, 한 번 더 큰 눈이 내리지 않을까. 큰 눈이 내리고 나면, 큰 눈이 하얗게 온 대지를 뒤덮고 나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저 눈이 대지 위의 온갖 슬픔을 덮어주리라는 생각. 저 눈이 하늘 아래 모든 고통을 녹여주리라는 생각. 그리하여, 다시 봄이 오고, 저 눈이 녹아내릴 때면, 삶이 재생되고, 모든 존재가 새로 태어나게 되리라는 기대를 품게 되는 것이다. 겨울비 끝에, 눈이 와서 다행이다. 물론, 영하 20도로 곤두박질치는 맹추위가 예고되어 있지만, 아직 이 겨울은, 그리 호락호락하게 자기 자리를 봄에게 내어줄 생각이 없지만, 그래도 머지않아, 입춘이 올 것이고, 우수의 빗줄기에 새싹이 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