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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식목제 May 30. 2023

아아, 너는 밥이 치욕인 줄도 모르고

희망은 만들지 못할, 밥이여

1

하필 석가탄신일 다음 날이라, 오래, 음력으로 쇠었음에도,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내 난 날을, 난 늘 잊고 싶어 했다. 검게 빛나는, 초콜릿 케이크를 싹둑 잘라, 욱여넣는다. 배고프지 않지만, 꾸역꾸역 밀어 넣는, 거무튀튀하면서도 영롱한, 초콜릿 케이크에 목이 멘다. 어머니, 당신은 어디에 있나요. 난 날에 통곡하고, 재가 된 날에 축제의 노래를 부르면 안 되는 건가요. 밥 먹는 일에 치욕을 느끼고, 굶어 죽는 일에 영광을 느끼면 안 되는 건가요. 삶이 죽음이고, 죽음이 삶이라 느끼면 안 되는 건가요. 아아, 아비는 시들어가는 짐승.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내 난 날, 아비를 만나, 난 그만, 치욕스러운, 허기를 느끼고 말았습니다. 배고파서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밥때가, 되었을 뿐.


2

허기 때문에 밥을 먹는 줄 알았는데, 실은 밥때가 되어 밥을 먹는 거였다. 살려고 밥을 먹는 줄 알았는데, 살아 있어서 밥을 먹는 거였다. 가파르게 경사진 고개 넘어 학교 가던 때, 행여 아침밥 거르면, 괜히 서글퍼지곤 했다. 그저 밥 한 그릇일 뿐인데, 그게 뭐라고, 당장 굶어 죽는 것이 아닌데, 그게 뭐 대수라고, 밥때가 목숨 같았다. 말하자면, 밥때가 허기였고, 밥때에 밥을 먹는 것이, 살아 있는 거였다. 몇 해 전, 어린아이 하나, 가슴팍 가까이 밥그릇 끌어당긴 채, 우걱우걱, 허기를 욱여넣는 걸 본 적 있다. 마치, 누구에게 빼앗길까, 두렵기라도 하듯, 아이는 한 손으로 그릇을 감싼 채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아이야, 너는 무슨 허기를 퍼 먹고 있느냐. 쌀알이 네 허기를 채워준다 약속했느냐. 아니에요, 그저 밥때가 되어 허기를 먹을 뿐, 난 배고프지 않아요. 살아 있어서 밥을 먹을 뿐, 살고 싶지 않아요. 아이야, 네 아비의 아비가, 고봉밥을, 천천히, 정성 들여 먹을 적에, 네 아비의 아비도, 살고 싶지 않았단다. 아이야, 네 아비가, 빈 밥그릇에, 허기를 채워, 빈 숟가락질을 을 할 적에, 네 아비도, 살고 싶지 않았단다. 아이야, 네 발바닥에 떨어진, 밥풀을, 주워 먹어야지. 그건, 네가 찾던 허기야. 밥때에 밥을 먹지 못한, 네 허기야. 아아, 너는 밥이 치욕인 줄도 모르고, 아아, 너는 목숨이 치욕인 줄도 모르고, 아아, 너는 빈 쌀독 뒤지는 네 허리춤에 치욕이 묻어 있는 줄도 모르고.




1

어느 날 밥이 내게 말하길

참, 아저씨나 나나……

말꼬리를 흐리며 밥이 말하길

중요한 것은 사과 껍질

찢어버린 편지

욕설과 하품, 그런 것도

아니고 정말 중요한 것은

빙벽氷壁을 오르기 전에

밥 먹어두는 일.


밥아, 언제 너도 배고픈 적 있었니?


2

밥으로 떡을 만든다

밥으로 술을 만든다

밥으로 과자를 만든다

밥으로 사랑을 만든다 애인은 못 만든다

밥으로 힘을 쓴다 힘 쓰고 나면 피로하다

밥으로 피로를 만들고 비관주의와 아카데미즘을 만든다

밥으로 빈대와 파렴치와 방범대원과 창녀를 만든다

밥으로 천국과 유곽과 꿈과 화장실을 만든다 피로하다 심히 피로하다

밥으로 고통을 만든다 밥으로 시詩를 만든다 밥으로 철새의 날개를 만든다 밥으로 오르가슴에 오른다 밥으로 양심 가책에 젖는다 밥으로 푸념과 하품을 만든다 세상은 나쁜 꿈 나쁜 꿈 나쁜

밥은 나를 먹고 몹쓸 시대를 만들었다 밥은 나를 먹고 동정과 눈물과 능변能辯을 만들었다, 그러나

밥은 희망을 만들지 못할 것이다 밥이 법法이기 때문이다 밥은 국법이다 오 밥이여, 어머님 젊으실 적 얼굴이여


_ 이성복, <밥에 대하여>,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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