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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식목제 Mar 26. 2022

그대들로 인해  내 삶이 빛났다

그해 여름, 그해 봄

# 1 _ 그해 여름


“하필이면 급경사길이 많은 동네에서/ 폐지를 모으는 할머니를 종종 본다/ 비 오는 날 그분을 만나면/ 세상이 폐지처럼/ 거미줄처럼 눅눅해진다/ 할머니시여, 빗방울보다 단단하소서”(황인숙, <장마> 중에서)


하필이면 장마 때 결혼을 했다. 7월 18일이었다. 실은 그때가 결혼식장 비용이 싸기 때문이었다. 아니 실은 가능한 한 빨리 결혼하고 싶었고, 그때가 하필 장마였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우리는 남하하는 장마전선과 함께 신혼여행지인 제주도로 내려가 쏟아지는 비를 구경하며 삼겹살을 구워 먹었다. 그게 우리 결혼의 시작이었다.


아내에게나 나에게나 달콤한 신혼 같은 것은 없었다. 새로 신혼살림을 마련한 것도 아니었고, 그저 각자 갖고 있는 살림살이를 긁어모아 괴산으로 향하는 트럭에 몸을 실었다. 반년 동안 농사 수업을 받던 곳이었다. 우리가 함께할 첫 집은 마을에서 한때 양조장으로 쓰이던 빈집이었다. 밤에는 벽에서 쥐가 드나드는 소리가 들리고, 파손된 슬레이트 지붕에서 비가 새는, 그런 집이었다. 그래도 아내는 쥐에게 겁을 주겠다면서 고양이 소리를 내는 나를 보며, 지붕에 임시로 커다란 비닐을 씌워 더 이상 비가 새지 않게 된 것을 보며, 갖가지 재료를 덧대 만든 간이 샤워 시설을 보며 즐거워했다.

하지만 그 즐거움은 주말에만 허락되는 것이었다. 아내는 아직 졸업을 한 학기 남겨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금요일 저녁에 양조장 집으로 내려왔다가 일요일 오후에 서울로 돌아가는 일상이 반년 동안 계속되었다. 둘 다 운전면허가 없어(사실 있다 해도 차를 살 돈은 없었지만) 이동수단으로 이용하던 스쿠터를 타고 청주로 가는 버스가 있는 면까지 데려다주곤 했는데, 버스에 올라 차창 너머로 울먹이던 아내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아내와 연인이 된 건 바로 전 해 늦가을 무렵이었다. 보통의 여자들과 달리 ‘아빠’를 ‘아버지’라 부르는 그 여자가, 저녁이면 식당으로 달려가 고된 아르바이트를 하는 그 여자가, 왠지 가난한 마음을 갖고 있을 것 같은 그 여자가 마음에 들어온 게 바로 그해 겨울이 되기 전, 바람이 많이 불던 어느 날이었다. 그건 급경사길이 많은 우리 동네에서 이른 아침마다 힘겹게 리어카를 끌고 오르던 어느 할머니를 볼 적에, 그 리어카를 뒤에서 밀 적에, 보통의 남자들과 달리 ‘엄마’가 아니라 ‘어머니’를 떠올리던 나와 닮아 있었다. 어머니, 빗방울보다 단단하소서.


# 2 _ 그해 봄

서울로 돌아온 뒤 부모님 댁에서 잠시 더부살이를 하다가 처음으로 살림집을 마련한 곳은 갈현동이었다. 아주 작은 집이었는데, 볼일을 보고 쭈그려 앉아 겨우 머리만 감을 수 있는 좁은 화장실이 딸려 있었다. 그래도 시골집에서 대문 밖에 있는 재래식 화장실에 적응하기 어려워하던 아내는 양변기가 갖춰져 있는 것만으로도 기뻐했다.(땅 밑에서 물이 많이 올라오는 재래식 화장실이라 큰일을 볼 때는 재빨리 엉덩이를 들어 올려야 한다며 둘이 키득거리곤 했다.)

사실 우리는 살림살이를 하며 가족을 꾸린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잘 몰랐다. 어쩌면 잘 몰라서 결혼한 건지도 모른다. 분명 각자 누군가의 자식, 누군가의 형제로 가족이라는 형태의 삶을 살아 본 적이 있었음에도, 우리는 그게 어떤 강물의 흐름에 자신을 맡기게 되는 일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다 아이가 태어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두 번째 아이였다. 아직 아이의 형태라 하기 어려운 시점에 첫 아이가 유산됐기 때문이다. 그때 아내는 참 많이 울었다. 나는 나대로 자책감을 느꼈다. 서울로 돌아온 뒤 수십 군데 이력서를 넣었음에도 아직 취업이 안 된 상태였고, 그 바람에 아내가 생활비를 버느라 자기 아버지의 사무실에서 경리 일을 하며 의정부로 출퇴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몸에 무리가 온 것이다. 다시 아이가 생겨났을 때, 그래도 그때는 내게 일거리가 생겼다. 출판사 일이었다. 여기저기 이력서를 내는 일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던 어느 날, 비가 참 많이 내리던 어느 날, 나는 대학 취업정보과를 찾았고, 거기서 출판사 아르바이트 자리를 만났다. 그렇게 일하기를 몇 개월, 운 좋게 편집부 정규직 일자리를 얻었고, 그때 아이가 세상에 나왔다. 4월 어느 날, 봄이었다.

아이가 태어나던 날이 생각난다. 아내는 예정일을 훌쩍 넘긴 상태였고, 병원에서는 유도분만을 시도했다. 하지만 아이는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곳이 너무 따뜻하고 안전해서 나오기 싫었던 걸까? 결국 우리는 제왕절개 분만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오후 5시를 넘어섰을 무렵 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담당 간호사가 아이를 확인하라며 나를 불렀을 적에, 아이를 금속 저울 위에 올려놓았을 적에, 아이가 그 차가운 이질감에 울음을 터뜨릴 적에, 딸아이만 넷을 키운 장모가 손뼉을 치며 기뻐할 적에, 사실 나는 뭔지 모를 슬픔을 느꼈다. 삶에 대한 애잔함이었다. 아이야, 빗방울보다 단단해지거라.


# 3 _ 5월의 신부

어머니는 5월의 신부였다. 5월 15일. 스승의 날과 겹쳐 기억하기가 쉽다. 20대 때까지 가족 앨범을 들춰보는 걸 좋아했는데, 거기서 두 분이 결혼 2주년 기념으로 찍은 흑백사진을 발견한 적이 있다. 그리고 두 분의 결혼 30주년이 되던 해, 나는 그 작은 사진을 사진관에 들고 가 확대해서 액자를 만들어 드렸다. 점점 시들어 가는 가족사 속에서, 그저 그이들이 30년 전 그이들의 마음을 기억하길 바랐다. 아니, 어쩌면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아버지, 어머니, 당신들 이렇게 곱고 예쁜 젊은이들이었어요. 사랑했지요. 그리고 잘 살아왔어요. 애썼어요. 그러니 지금 우리가 서로 미워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요?


오래전 어느 날 아버지에게 형을 얻었을 때 어떤 기분이었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제 그 세상은 어디에도 없다. 안타깝지만, 어머니의 배에 남아 있었던 기다랗고 선명한 흉터처럼 5월의 신부 이야기는 세상의 많은 일들이 그렇듯 아름답게만 이어지지 않았다.


어머니의 배에 남은 상처는 나를 나은 뒤 생긴 것이었다. 위로 형과 누이를 모두 자연 분만했던 어머니였지만, 나는 난산이었고 결국 제왕절개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단다. 그런데 봉합해 놓은 수술 부위가 격렬한 기침 몇 번으로 터져 버린 것이다. 그렇게 흉터가 남았다. 나로 인해 어머니의 배에 흉터가 생겼다는 걸 강조하려는 건 아니다. 그건 그저 삶의 고단함이 만들어 낸 상처였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내가 칠순 때 만들어 드린 시집에서 이렇게 적었다. “너희들로 인해 내 삶이 빛났다.” 언젠가 나도 마지막이 다가올 때 이렇게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내 아내, 내 아이, 그대들로 인해 내 삶이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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