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잘 쓴다고 좋은 삶을 사는 건 아니다

그래도 글을 쓰며 마음과 소통하는 건 괜찮겠지

by 식목제

글을 꼭 잘 쓸 필요는 없다. 글쓰기를 잘하지 못한다고 해서 삶을 살아가는 데 심대한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전 글을 쓰고 싶어요. 마음을 쓰고 싶다고요. 그럼 글을 쓰면 된다. 하지만 꼭 잘 쓸 필요는 없다는 얘기다. 게다가 글을 잘 쓴다는 게 대체 무엇인가. 만약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고, 그걸 글로 풀어내고, 풀어낸 이야기를 통해 다시 자신의 마음, 생각, 감정과 소통하는 일에 관한 거라면, 이때는 잘 쓴 글이냐, 못 쓴 글이냐를 굳이 판별할 필요도 없다. 타인의 칭찬이나 비판을 신경 쓸 필요 없이, 그저 진솔하게, 아무런 과장과 치장 없이, 스스로에게 말을 건네듯 써 내려가면 되는 것이다.


물론 책이라는 물성을 지닌 매체로 자신의 글을 세상에 내놓고 싶은 경우라면 이야기가 약간 달라진다. 게다가 그저 제 돈을 들여서라도 책이라는 물건을 만드는 것 자체에 목표가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달리 말해 세상의 독자들이 지갑을 열어 기꺼이 읽고 공감하는 책을 만드는 것이 목표라면, 이때의 글쓰기는 분명 좀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될 수 있다. 청중을 사로잡는 강의와 연사가 있는 것처럼, 독자를 매료시키는 책과 저자가 있는 법이다. ‘강의’와 ‘연사’, ‘책’과 ‘저자’라는 두 축으로 언급한 데는 이유가 있다. 단순히 언변이 좋다고 해서 청중을 끌어모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어떤 주제, 어떤 강의인지도 굉장히 중요하다. 책도 마찬가지다. 글재주가 있다고, 글쓰기 좀 한다고, 누구나 독자들이 읽고 싶어 하는 책을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어떤 주제의 어떤 책인지가 중요한 이유다.


어떤 주제, 어떤 책이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내는지는, 알 수 없다. 뭐라고? 이런 대책 없고 무책임한 발언이 있나. 아니다. 정말 알 수 없다. 실은, 좀 더 정확하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계속해서 변화한다. 대중적인 글쓰기가 어려운 까닭이 여기에 있다. 글솜씨도 있고, 주제를 설정할 능력도 있지만, 세상의 흐름을, 그 흐름 속에서 변화하는 삶의 이야기를 읽어낼 능력이 없다면, 능력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관심과 애정이 없다면, 공감을 자아내는 대중적 글쓰기를 하기가 어려워진다.


이 지점에서 약간의 오해가 생길 여지가 있고, 그 오해가 대단히 위험한 생각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럼 급변하는 세상의 트렌드에만 관심을 기울이면 되는 건가요? 아니다. 기존의 주장을 뒤집는 듯한, 좀 이상한 말이지만, 세상에는, 우리 삶에는 변함없이 중요한 가치가 있고, 실은 그 불변의 가치가 글쓰기와 책의 매우 중요한 화두이자 고갱이다. 이게 무슨 개떡같은 소리인지. 좀 전에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에 관심을 기울이는 게 중요하다 하지 않았나요? 중요하다. 다만, 변화하는 것과 불변하는 것이 양립 불가능하지 않고, 오히려 그 둘 모두를 잘 들여다보는 것이 대중적 글쓰기의 핵심이라는 얘기다.


인간이라면 변치 않고 관심을 기울이는 주제가 있다. 이를테면 인간, 인간관계, 인간관계 속에서 피어나는 갖가지 생각과 감정들도 거기에 속한다. 인간과 인간관계라는 대주제는 더 세분되기도 한다. 인간 자체에서는 실존과 고독, 삶과 죽음,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 등 갖가지 소주제가 이끌려 나올 수 있고, 관계의 경우에도 가족, 일, 사랑, 우정 등 다채로운 관계 양상을 떠올려볼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인간이 사회적 존재로 집단을 이루며 살아온 이후, 좀 더 좁히자면 문명화된 사회에서 공동체로 살아온 이후 끊임없이 회자되어온 주제다. 여기서 중요한 건, 그 불변의 가치가 세상에서 발현되는 양상은 계속 변화해 왔다는 점이다. 공동체를 지배하는, 공동체가 공유하는, 공동체가 공감하는 생각과 마음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자기 속내를 털어놓고 싶은 거라면, 내가 이 공간에서 쓰듯, 일기를 쓰듯, 마음을 쓰면 된다. 하지만 대중적 글쓰기를 하고 싶은 거라면, 그저 독백에 그쳐서는 좀 곤란하다. 비록 나의 이야기라 할지라도, 상대에게 건네는 이야기, 상대로부터 화답받는 이야기, 말하는 이와 듣는 이가, 쓰는 이와 읽는 이가 상호 소통하고 교감하는 이야기여야 한다. 지금 논의되고 있는 것이 주로 에세이 글쓰기에 대한 것인가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에세이가 변화하는 흐름에 가장 민감한 글쓰기를 요구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주제가 인문이든 과학이든 경제경영이든, 변화된 세상의 지형 속에서 읽는 이들의 생각이나 마음과 소통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쓰이면, 외면받는다.


누구나 대중적 글쓰기를 할 필요는 없다. 글쓰기의 목표가 꼭 세상의 다중에게 내보이기 위한 것일 필요도 없다. 하지만, 가끔은 글쓰기의 목표를 확장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게 하는 글을 발견하기도 한다. 아마도 오래 일한 업계에서 체득한 직업병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편집자가, 그런 글쓰기를 하는 예비 필자를 발견하는 것은 꽤 흥분되는 일이다.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은 점점 많아지지만, 그런 글쓰기를 하는 사람을 발견하는 건 의외로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렇게 발견된 예비 필자의 글이 궁극적인 책 출간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더욱 드물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가끔은 글솜씨에 속기도, 아니, 모르고 속는 것이라기보다 기꺼이 속아주기도 했다. 후배 편집자가 발견해낸 검사 필자가 생각난다. 그이는 글을 정말 잘 썼다. 후배가 “이 글 어때요?” 하고 건넸을 때, 난 단박에 알아차리고 말았다. 이만한 글을 쓰는 필자를 만나기는 쉽지 않으며, 한 권 분량을 받아내기만 한다면 반드시 팔린다. 얼마나? 아주 많이. 한 권 분량이 모이는 데 1년이 걸렸다. 1년 동안 딱히 별다른 주문을 하지 않았다. 당신이 쓰고 싶은 대로 아무 내용이든 다 써라. 책 구성은 우리가 해준다. 책이 나왔고,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속아준다는 말은, 글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것이다. 그이의 글은 우리를 속이지 않았다. 좋은 글이 모일 줄 알았는데, 막상 많은 분량을 받고 보니 글쓰기가 형편없었던 게 아니다. 1000매 넘는 원고가 단 한 장의 배신도 없이 훌륭했다. 다만, 그이의 글 중간중간에 보이는, 행간 곳곳에 묻어 있는, 그 사람이 마음에 걸렸다. 몇몇 구절은 너무 마음에 걸려 아예 걷어내거나 표현을 수정하기도 했는데, 다행히도 그이는 그걸 문제 삼지 않았다. 그 정도는 편집자에게 맡겨놓아도 괜찮다는, 자기 글에 대한 자신감에서 나오는 일종의 여유이기도 했다. 난, 그이의 허영심과 불편한 욕망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그이의 글 곳곳에 내재된, 짐짓 아닌 척하지만, 실은 그 욕망을 감추느라 치장하는, 그것이 보여서 꺼림칙했다. 그래서 책을 편집하던 중, 한번은 그이에게 메일로 이런 말을 건넸다. “글과 사람이 다른 경우를 참 많이 봤는데, 부디 검사님이 글과 너무 먼 사람은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뭐, 아쉽게도, 그이는 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른 뒤, 이런저런 일로 언론에 오르내리더니, 곧 정치인이 되었다.


사실 속아주었다는 말은 좀 웃기는 소리다. 속아주지 않았다면, 내가 그이의 원고 수집을 중단하거나, 책 편집을 거부했을 거란 말인가? 아니다. 현란한 글솜씨에 현혹돼 미심쩍은 마음을 아무렇지 않게 덮어둔 스스로에 대한 자책감 때문에 괜한 소리를 하는 것뿐이다. 심지어 약간 문제가 될 만한 표현들은 기꺼이 수정해주거나 삭제해주기도 했다. 그러니, 그이의 이후 행보를 보며 내심 ‘그럼 그렇지’ 하면서도, ‘뭐가 그럼 그렇지야, 넌 잘 팔리는 책을 만들고 싶다는 사적 욕망 때문에 그이의 원고를 정성껏 다듬어준 것 아니었나? 넌 무욕의 존재였다고 말할 수 있나?’라고 질책하게 되는 것이다.


글을 꼭 잘 쓸 필요는 없다. 물론 글을 잘 써서, 부나 명예를 얻을 수도 있고, 자기실현을 하거나 세상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다. 하지만 글을 잘 쓴다고 해서 좋은 삶을 사는 건 아니다. 굳이 문단에서 일어났던 추잡한 사건을 거론할 필요도 없다.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는 이야기다. 어린 시절, 일기를 썼던 이유는, 일기를 쓰라 했던 이유는, 사실 글쓰기 연습을 하라는 것이 아니었다. 매일의 삶을 돌아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난 글쓰기 연습을 하듯 일기를 쓴 적도 많았다. 어른들에게 잘 썼다는 칭찬을 받으면 기분이 좋아졌기 때문이다. 칭찬이라는 속된 동기가 중단된 청년기에 난 더 이상 일기를 쓰지 않게 되었다. 이후 내가 다시 이런저런 공적, 사적 글을 쓰게 된 건, 출판사에서 일하게 되면서부터였다.


이 공간에서 언제까지 글을 쓰게 될지 잘 모르겠다. 그래도, 몇 개월에 걸쳐 이렇게 꾸준히 마음을 쓰는 게 참 오랜만의 일이다.(몇 개월이라 하니, 문득 수천 일 글쓰기 수행을 했다는 누군가가 떠올라 좀 작아지기는 한다.) 마음을 쓰다 보니, 쓴 마음을 다시 읽다 보니, 나라는 존재가 품은 희로애락이 비교적 더 선명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물론, 때때로, 고통은 계속될 것이고, 우울도 지속될 것이다. 하지만, 안고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녀석들이 나를 끌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녀석들을 잘 안고 살아가는 법 말이다.


거듭 말하지만, 글을 꼭 잘 쓸 필요는 없다.

그러나, 글을 쓰면서 마음을 들여다볼 필요는 있다.

마음과 소통할 필요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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