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건 천천히 태어나는 일

사는 일이 어려울 땐 생텍쥐페리의 비행 문학을 기억한다

by 식목제

산다는 것은 천천히 태어나는 것이다. 완전하게 만들어진 영혼을 갖고 태어난다면, 그건 너무 편하지 않은가. _ 《전시 조종사》 중에서


살면서 나를 가장 많이 사로잡은 작가와 작품을 꼽으라면 난 주저 없이 생텍쥐페리와 그의 작품들을 말할 것이다. 《어린 왕자》 때문이 아니다.(물론 난 《어린 왕자》를 좋아한다.) 《야간비행》 《인간의 대지》 《전시 조종사》 때문이다. 비행 문학 3부작(공식적인 명칭이 아니라 그냥 내가 갖다 붙인 말이다)이라 할 만한 이 작품들을 읽었던 젊은 날, 난 생텍쥐페리에게 완전히 매료되었다.


생텍쥐페리는 무척 서정적이고 시적이며 아름다운 문장들을 구사하는데, 그 문장들이 그토록 아름답게 느껴지는 진짜 이유는 그것들이 모두 그가 직접 경험한 치열한 삶에서 비롯되었다는 데 있다. 그는 그저 사변적인 문장가가 아니었다. 그는 인간 삶의 가장 맹렬한 현장에 뛰어들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그 속에서 살아 숨 쉬는, 그러다가 여지없이 죽어 가는 인간들을 목격했다. 그는 인간을, 인간 삶을 사랑했지만, 죽음을 부정하거나 외면하지 않았고, 그렇기에 언젠가는 자신이 “죽음이라는 개념에 대해 완전히 무관심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그것은 가장 가열 차게 살아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죽음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조차 끌어안는 삶만이 토로할 수 있는 말이었던 것이다.


그의 소설을 읽다 보면, 그가 왜 그토록 비행을 고집했는지, 왜 그토록 비행을 통해 삶을 살아내고, 사는 일을 성찰하고자 했는지 알 것만 같은 막연한 생각이 들곤 한다. 지금과는 비행 환경이 판이했던 그때, 많은 것을 인간의 오감에 의지해야 하는 소형 비행기를 몰고 우편물을 수송하거나, 전선에 뛰어드는 행위는 칼끝에 선 삶을 가장 적나라하게 체감할 수 있는 일 아니었을까. 그때 비로소 그이는 인간의 본성과 삶의 본질을 아주 구체적으로 깨달을 수 있지 않았을까. 또한 저 높은 하늘 위는 인간의 삶을, 대지의 일을,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대지와 대지의 맞닿음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한눈에 품어 안을 수 있는 곳 아니었을까.


그는 《인간의 대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방향을 함께 바라보는 것임을.” 그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죽음의 선을 넘나드는 비행을 할 때, 삶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한 비행을 할 때, 삶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비행을 할 때, 사랑하는 이들은 서로를 지키기 위해, 기류를 따라 흐르는 그 외롭고 험난한 비행의 향방에서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다는 걸 말이다.


생텍쥐페리가 《전시 조종사》에서 ‘완전하게 만들어진 영혼을 갖고 태어나는 건 너무 편안한 일’이며, 그렇기에 우리는 ‘살면서 천천히 태어나게 된다’고 말한 것은, 그의 삶을 비춰 볼 때 결코 허튼소리가 아니었다. 실제로 그이는 불완전한 영혼을 끌어안고 끊임없이 성찰했으며, 목숨을 건 비행을 통해 천천히, 하지만 맹렬하게 태어났다.


지독하게 오랜 봄 가뭄에, 가뭄에 얹어진 강풍에, 바람에 흩날리는 흙먼지에, 유난히 어렵기만 한 올해 봄 농사에 몸은 고되고, 마음은 어수선해지다가, 문득 생텍쥐페리와 그이의 비행 문학 3부작을 떠올린다. 언젠가 난 밭에서 죽고 싶다, 했다. 그럴 수 있을까? 생텍쥐페리는 결국 하늘을 날다가 마지막을 맞이했다. 그이가 전사한 것인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인지는 중요치 않다. 중요한 건, 그이가 천천히 태어난 그곳에서, 불완전한 영혼을 끌어안고 인간과 삶을, 인간의 대지를 성찰하던 그곳에서 끝을 맞이했다는 것이다. 난 그이가 자신이 바라던 바대로 죽었다고 믿는다. 나도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


이 이야기의 끝은, 《인간의 대지》 서문으로 마무리하련다. 난 이 짧은 에세이를 참 좋아한다. 여기에 그이의 비행 문학 3부작이 담고 있는, 그가 치열하게 성찰하고 끌어안았던, 삶의 이야기의 요체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이처럼 살지 못했지만, 그이의 이야기를 기억한다.


대지는 우리 자신에 대해 세상의 모든 책들보다 더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이는 대지가 우리에게 저항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장애물과 겨룰 때 비로소 자신을 발견한다. 하지만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연장이 필요하다. 대패나 쟁기가 필요한 것이다. 농부는 땅을 갈면서 자연의 비밀을 조금씩 캐낸다. 그가 캐내는 진리야말로 보편적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은 항공로의 연장인 비행기를 통해 모든 오래된 문제와 직면하게 된다.


아직도 나는 아르헨티나로 맨 처음 야간비행을 하던 때 보았던 광경이 눈앞에 선하다. 평야에 드문드문 흩어진 불빛만이 별처럼 반짝이던 캄캄한 밤의 모습이.


그 불빛 하나하나가 칠흑 같은 어둠의 대양 속에서도 의식이라는 기적이 있음을 알려주었다. 그 불빛의 보금자리 안에서 사람들은 읽고 생각하며 마음속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다. 다른 보금자리에서는 어쩌면 우주를 탐색하며 안드로메다 성운을 계산하느라 녹초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또 저쪽에서는 사랑을 나누고 있었을 것이다. 그때 불빛들은 들판 군데군데서 각자의 양식을 달라며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었다. 시인, 교사, 목수의 불빛 같은 가장 소박한 불빛까지도 반짝였다. 하지만 그 살아 있는 별들 가운데에는 닫힌 창문과 꺼진 별빛과 잠든 사람들 또한 얼마나 많을 것인가.


우리는 서로 맺어지기 위해 꼭 노력해야 한다. 들판 여기저기에서 타오르는 저 불빛들 중 몇몇과 소통하기 위해 애써야만 하는 것이다.

_ 《인간의 대지》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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