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경, 슬픔이라는 거름
내일은 탈상
오늘은 고추모를 옮긴다.
홀아비 꽃대 우거진 산기슭에서
바람이 내려와
어린 모를 흔들 때
막 옮기기 끝낸 고추밭에
편편이 몸을 누인 슬픔이
아랫도리 서로 묶으며
고추모 사이로 쓰러진다.
슬픔만 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남녘땅 고추밭
햇빛에 몸을 말릴 적
떠난 사람 자리가 썩는다
붉은 고추가 익는다
_ <탈상>, 허수경, 《슬픔만 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2018년, 허수경 시인이 세상을 떠나던 해, 같은 출판사에 근무하던 후배는 시인의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시인의 죽음 앞에, 그이는 마음이 무너져 내렸고, 속절없이 눈물이 나는 걸 어찌할 수 없다 했다. 난 그 마음을 너무나 잘 알 것만 같았다. 때로, 시는, 시의 노래는, 시의 이야기는, 시의 외로움은, 시의 쓸쓸함은, 시의, 시의, 시의, 시는, 청춘에게, 마음과 영혼을 기댈 유일한 거처가 되기도 하고, 특히 허수경 시인처럼 너무나도 고독하고 쓸쓸한 언어로 삶을 이야기할 때, 그 내밀한 언어와 조우한 우리는 마음속 깊은 우물에서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을 수가 없게 된다. 그렇게 마음을 기대던 시인이 세상과 작별했을 때, 그이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난 진심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난 허수경의 초기작 <탈상>을 읽을 때마다, 늘, 가슴이 저미고, 절로 눈물이 나는 걸 참을 수 없었다. 고추모를 옮기고, 탈상을 하고, 고추모 사이로 편편이 묶인 슬픔이 쓰러지고, 슬픔이 거름이 되고, 그것으로 붉은 고추가 익는, 삶이란 그런 것이었다.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설명하려 하지 않아도, 기어코, 알고야 말게 되는, 슬픔을 거름 삼아 살아지는 삶. 그러니, 죽음도, 탈상도, 다 삶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엊그제, 문득, 고추를 심다가, 고추를 심고 나서, 봄 가뭄에 모로 누운 고추 하나를 보며, 생각했다. 그래도, 결국, 살아남은 고추는 얼마 지나지 않아 붉게 익어갈 것이다.
어린 날에는 슬픔을 견디기 힘들어, 슬픔이란, 고통이란, 시간이 흘러 흘러, 언제든, 언젠가, 사라져야 할, 사라졌으면 하는, 무엇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켜켜이 쌓이며 알게 됐다. 슬픈 마음도, 고통스런 마음도, 쓸쓸한 마음도, 쌓이고 쌓여 썩어 문드러질지언정, 결코 사라지는 건 아니라는 것을. 날것 그대로 남아 있지는 않더라도, 부패된 채 구더기 들끓진 않더라도, 썩고 썩어 거름이 될지언정, 완전히 사라져버리는 건 아니라는 것을. 그러니 나를 먹여살린 건, 나로 하여금 기어코 살아내게 한 건, 나를 끝내 익히고 붉게 물들인 건, 사실 슬픔이었던 건지도 모른다.
허수경은 시집 《혼자 가는 먼 집》 표지글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나는 마음이 썩기를 원한다. 오로지 몸만 남아 채취되지 않기를, 기록되지 않기를, 문서의 바깥이기를. 이것이 마음의 역사다.
그 역사의 운명 속에서 내 마음의 운명을 끼워넣으려 하는 나는 언제나 몸이 아플 것이다.
하지만 아직 마음은 썩지 못했다. 적어도 나의 마음은 썩지 못해, 아직 온전한 거름이 되지 못했다. 어쩌면 끝내 육신으로 남아, 마음은 허공을 맴돌며 떠돌지도 모르고, 난 마음을 잃은, 마음의 역사가 없는, 썩지 못하는, 언제나 몸이 아프겠지만, 끝내 운명을 알지 못하는, 가련한 존재로 생을 마감하게 될지도 모른다. '혼자 가는 먼 집'의 고독하고도 쓸쓸한 여정에서, 나는 어쩌면, 끝내 당도하지 못하고, 몸만 남아 채취될지도 모른다. 이 비정형의 고독이, 쓸쓸함이, 막막함이, 오늘도 나를 에워싼다.
오랜만에, 허수경을 읽는다.
오랜만에, 나를 읽는, 나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