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만들던 젊은 날

편집자로 살아가던 나날을 기억하다

by 식목제

혼자 번역과 편집까지 손수 하며 1인 출판을 하는 이웃의 연재 글을 읽다 보니, 문득 편집자로서 살아가던 지난날이 생각난다. 내가 처음 출판사에 들어간 1999년은 지금의 출판 환경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었다. 당시는 이제 막 '전자 출판' 시대가 열리는 시기였다. 출판사에 애플의 매킨토시 시스템이 도입되기 시작했고, Quark Xpress라는 마법의 편집 프로그램(당시로서는 정말 마법 그 자체였다)이 출판에 일대 혁명을 불러온 시기였다. 이와 함께, 역시 기적의 도구라 할 만한 Photoshop과 Illustrator가 디자인의 지평을 바꾸었고, 이 마법의 툴 3가지로 인해, 이른바 '북 디자인'이라는 전문 분야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 시기부터 지금까지 책이라는 물건에서 '디자인'과 '폰트'가 차지하는 영역과 비중이 점점 커지게 되었고, 바야흐로 '아름다운 책'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이 시기 이전까지, 책은 '텍스트'가 중심이 되는, 지식과 정보의 전달자라는 역할이 더 중요시되는 매체였다. 물론 지금도 그 역할을 하고 있지만, 이제는 책 이외에도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는 매개체가 많아졌다.


난 기적의 도구들이 도입되기 이전부터 편집자로 일한 선배들과 출판 일을 시작했다. 내가 처음 사장을 포함해 6명밖에 되지 않는 소규모 출판사에 들어갔을 때, 출판사에는 책상마다 컴퓨터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온라인 환경이 지금처럼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던 시절이 아니었고, 온라인에 지금처럼 엄청난 양의 정보가 돌아다니지도 않았다. 편집자 공용 컴퓨터가 하나 있었고, 그건 대개 초창기 한글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데 쓰였다. 편집자의 책상에는 각종 종이 사전(국어사전, 영어사전, 그 외 언어 사전 등)이 비치되어 있었고, 사무실 한쪽에는 종이 백과사전이 구비되어 있었다. 필요한 경우에는 언제든 지역 도서관이나 대학 도서관에 가서 정보를 찾아봐야 했고, 이미지를 구하려면 언론사에 직접 찾아가 필름 대여를 받아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많은 것들이 직접 발로 뛰며 수작업해야 하는 것들이었다. 따라서 편집자가 하루 종일 책상에만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책의 종류, 작업 공정에 따라 수시로 외부에 나가야 했다. 저자나 역자와 일을 벌이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초기 이메일 버전들이 있긴 했지만, 사람과 연계된 건은 무조건 대면 미팅을 통해 일을 처리해 나갔다. 필자를 오라 가라 할 수 없으니, 제법 먼 곳까지 발로 뛰는 것이 다반사였다. 난 선배 편집자가 된 후, 온라인 환경이 혁명적으로 바뀐 후에도, 후배들에게 종종 필자와는 가급적 수시로 직접 만나 이야기 나누라고 조언하곤 했다. 얼굴을 보고, 눈빛을 응시하고, 사소한 뉘앙스와 이야기의 흐름에 집중하다 보면, 문자나 이메일이나 휴대전화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들을 나눌 수 있기 때문이었다.


디자이너와의 일도 마찬가지였다. 마법의 도구가 생겨나긴 했지만, 책의 느낌, 디자인의 방향에 대해 직접 만나 이야기 나누는 것만큼 효과적인 것은 없었다. 때때로, 책의 초고를 읽고, 원고의 인상에 대해, 책의 느낌에 대해 적극적으로 의견을 피력하는 디자이너를 만나면, 책 만들기가 몇 배로 즐거워지곤 했다. 편집자와 디자이너가 그렇듯 생산적으로 소통한 경우, (아주 소수의 예외를 제외한다면) 대개는 최선의 결과물이 나오곤 했다. 이는 책 제작 공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예전에는 요즘과 같은 '원스톱' 인쇄 제책 시스템을 갖춘 공장이 많지 않았다. 이제는 최종 pdf 결과물을 인쇄소에 넘기면, 거기서 '알아서' 나머지 공정을 책임져주지만, 전자출판이 처음 도입되던 시기에는 모든 공정을 편집자가 발로 뛰며 해결해야 했다. 인쇄용 필름 출력(예전에는 투명 필름에 활자와 이미지를 출력한 뒤, 이를 전사해 인쇄 판을 만들었다), 본문 인쇄, 표지 인쇄, 표지 코팅, 기타 표지에 들어가는 후작업, 제책 등 제작에 참여하는 각 소규모 업체들을 일일이 뛰어다니며 작업 공정을 확인하곤 했다. 제작 일정이 빠듯할 때는, 편집자가 공장에 찾아가 담당자를 조르며, 밤을 새워 일을 처리하는 게 다반사였다.


잡다하게 챙겨야 할 일들이 많으니, 원고 볼 시간이 부족한 건 당연했다. 그러니 발로 뛰어다니는 일들을 낮에 처리하고, 매일같이 야근을 하며 원고를 보곤 했다. 게다가 당시에는 초교 작업도 컴퓨터 파일에 직접 하는 시스템이 아니었던지라, 일일이 손교정을 보고, 그걸 다시 한글 파일에 직접 입력해야 했으니, 시간이 이만저만 많이 드는 게 아니었다. 소규모 출판사의 경우, 편집자도 Quark을 이용한 기본적인 본문 작업을 할 줄 알아야 했고, 따라서 초교 단계뿐 아니라 이후 최종교 단계까지도 원고를 손보고 본문 디자인을 하고 디자인된 본문에 재교, 삼교, 사교, 기타 등등 교정사항을 입력하는 일까지, 모두 편집자의 몫이었다.


책을 홍보하기 위해 편집자가 발로 뛰어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마케팅 담당자나 홍보 담당자에게 맡기면 된다고? 아니다. 홍보 담당자가 따로 있지도 않았거니와, 온라인 홍보 매체가 없던 시절에는, 신문 지면에 광고를 싣거나, 보도자료를 엄청 잘 써서 문화 면 책 소개를 유도하는 것 외에 딱히 책을 알릴 방법이 많지 않았다. 물론 보도자료만 잘 써서 되는 건 아니다. 책 자체가 기자들의 구미를 당겨야 한다. 아무튼, 그때는 언론 기사를 타는 게 굉장히 중요해서, 보도자료 작성에 뼈를 갈아 넣었고, 신입 편집자의 경우 편집장에게 숱하게 퇴짜 맞는 보도자료로 인해 눈물로 밤을 지새우는 경우도 많았다. 이렇게 정성 들여 작성한 보도자료를 이제 이메일로 보내거나 책과 함께 택배로 배송하면 된다? 아니다. 주요 일간지의 경우 편집자가 책과 보도자료를 들고 언론사로 직접 찾아갔다. 얼굴 보고, 인사드리고, 바쁘다며 귀찮다고 해도 소매 끝을 부여잡은 채 책 설명을 다시 하고, 잘 부탁드린다고 거듭 인사하고, 뭐 그런 시스템이었다. 이렇게 보도자료를 넘기고 나면, 편집장과 나는 금요일 저녁 6시 무렵 광화문 가판대에 처음 등장하는 토요일자 조간을 애타게 기다렸고, 언론 기사가 이른바 '대문짝' 만하게 실리면 기분이 좋아져 종로 선술집에 가 술잔을 기울이며 책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이렇듯 홍보 수단이 많지 않다 보니, 중요한 책일 경우 가끔은 홍보용 전단지나 사은품 같은 걸 준비해 거리로 나가 지나가는 시민에게 나누어 주는 일도 편집자가 해야 할 여러 일들 중 하나였다.


매 분기마다 책 배본사의 창고를 방문해, 반품이 들어온 책을 정리하는 것도 주요 업무 중 하나였다. 소규모 출판사에서 이 일은 굉장히 중요한 업무였는데, 반품 정리를 할 사람을 따로 고용할 경우 발생할 비용을 아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어떤 책이 어떤 지역 어떤 서점에서 어떤 상태로 되돌아오는지 직접 확인할 수 있었고, 깨끗하게 갈무리해 다시 내보낼 책들을 정성스럽게 골라낼 수 있었으며, 폐기 처분해야 할 책들을 엄선함으로써 책 보관 비용을 줄일 수 있었다. 덤으로, 출판사 사장 입장에서는 실패한 책들이 잔뜩 반품으로 쌓여 있는 것을 직원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대신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아무튼, 당시 편집자가 해야 할 일은 아주아주 많았다. 힘들었냐고? 아니, 재미있었다. 난 편집자가 이런저런 다채로운 일들을 몸으로 뛰며 하는 것이 꽤 즐거웠다. 편집자로서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을 때, 난, 물론 관리자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모든 것이 컴퓨터와 온라인 시스템으로 다 해결되는 출판이 그다지 재미가 없었다. 번역자의 얼굴도, 디자이너의 얼굴도, 인쇄소 기장님(인쇄기 하나마다 배속된 베테랑 책임자)의 얼굴도, 책 배본 창고 담당자 얼굴도 한 번 보지 못한 채, 어느 날 사무실로 "새 책 나왔습니다" 하고 배송되어 오는, 그런 책 만들기가 난 별로 재미가 없었다.


물론 책 만드는 환경이 바뀌면서, 편집자들은 '기획자'로서 역량을 발휘할 시간을 더 많이 갖게 되긴 했다. 그래서 내가 처음 출판사에 들어갔을 때는 없었던 '기획편집자'라는 말도 생겼다.(예전에는, 편집자는 그냥 편집자였다.) 편집자가 기획자로서 인정받는 시대가 온 것이, 난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출판사 사장들도, 편집장들도, 이제는 '반짝이는' 아이디어로 '잘 팔리는' 책을 기획하는 편집자만을 중시하고, 예전처럼 묵묵하게, 정성 들여, 마음을 다해, 텍스트를 손보고, 보도자료를 작성하는, 그리하여 조금이라도 더 완성도 높은 문장을 만들어 내기 위해 밤을 지새우는, 이른바 '전통적인' 편집자들을 그다지 중히 여기지 않는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은 있다.(마지막에 다닌 어떤 출판사의 편집주간은, 내 후배 편집자가 열심히 문장을 다듬는 걸 보더니, 그만 고치라고, 그렇게 꼼꼼히 손보느라 시간 보낼 필요 없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그런 사람이 감히 '주간' 일을 하고 있다는 게 난 믿기지가 않았다. 사실 '편집주간'은 아무나 수행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고, 아무나 수행해서는 안 되는 자리이기도 하다.) 예전에 어떤 출판 선배는 한 강의에서 그런 전통적인 일은 이제 베테랑 '외주' 편집자에게 맡기면 그만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는데, 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럼, 그 베테랑들이 진짜 은퇴하고 나면?' 물론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여전히, 묵묵하게 그 일을 해내고 있는 젊은 편집자들도 아주 많이 있기 때문이다. 난 그런 후배들을 좋아했다. 그런 후배를 만나면, 무엇이라도 돕고 싶었고, 무엇이라도 가르쳐주고 싶었다. 그이들이 또 전통적인 편집자의 일을, 그 일에 임하는 마음을, 자신의 후배들에게 전해줄 것이다.


책 만드는 일을 그만두고 몇 년이 지나니, 문득 그때가 그리워진다. 문장 하나에 목숨이라도 걸 것처럼 매달리던 시간들, 선배들과 선술집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 이야기를 하던 순간들, 책이 만들어지는 전 공정에서 이곳저곳 뛰어다니며 숨차 하던 나날들,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가 내 삶에서 가장 생기 넘치는 시기였다. 마음은 우울의 늪을 건너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 우울한 마음을 끌어안고, 어떻게든 삶을 살아내려 했던 그때, 젊은 날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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