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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Bs Nov 25. 2019

[OB's시네마] 1994년이라는 생채기

김보라 <벌새>

화면 속의 인물이 겪고 있는 고통이 너무 현실적이거나, 그게 내가 아는 종류의 고통일 때, 가끔 물리적인 아픔을 느낀다. 가슴이 욱신거린다. 답답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두려워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벌새를 보면서 몇 번씩 가슴이 욱신거렸다. 내가 좋아하는 <응답하라 1994>와는 너무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본 1994년의 서울 이야기. 그리고 그 도시의 은마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중학교 2학년 은희. 응사를 통해 접한 94년은 낭만 그 자체였다. 카세트에서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놓고 삐삐 인삿말을 녹음하고 공중 전화에 줄을 서서 삐삐 메시지를 확인하는 청춘. 신촌은 푸르고 서울은 활기찼다. 빛이 넘실거렸다.

벌새가 그리는 94년의 서울의 여름은 낭만과는 거리가 멀었다. 여전히 여름은 푸르고 아름다웠지만 아무리 여름이 눈부셔도 빛을 찾아 헤매야만 빛의 그림자라도 좇을 수 있는 은희가 있어서 감히 낭만을 노래하는 게 사치처럼 느껴졌다. 


군부 독재가 끝난지 몇 년이 지나지 않은, 민주주의를 이제 겨우 손에 쥐어본 94년도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민주주의 외에도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 가족은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가장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자식은 어떻게 보듬어 안아 키워야 하는지, 친구에게는 어떤 말을 하고 어떤 말을 아껴야 하는지. 물론 지금도 모든 사람들이 그걸 알고 있지는 않지만(나도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2019년의 우리는 사랑이라 가장한 폭력을 경계하고 그걸 지양해야 한다는 사실 쯤은 알고 있지 않나.

하지만 94년엔 그렇지 않았다는 걸, 사실 나도 그런 90년대를 살아왔다는 사실을 기억해내버렸다. 그걸 영화를 통해 배운 게 아니라 내 기억 속에서 찾아내버렸다. 그래서 은희의 부모님이 싸우는 모습을 보며 눈을 감고 싶었다. 눈을 차마 감지 못해서 가슴이 욱신거렸던 것 같다.


그래도 나는 94년에 겨우 3살이었으니. 나는 김영삼도, 94년의 살인 더위도, 성수대교도, 95년의 삼풍백화점도 모른 채 천진하게 살았으니까. 그리고 12년 만큼 더 배우고 더 성장한 세상을 살며 더 큰 사랑과 덜한 폭력 속에서 자랄 수 있었던 게 모두 그 시대에 10대를 살아야만 했던 은희들 덕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부채감 역시 나를 물리적으로 아프게 했다. 우리는 언제나 모두가, 과거에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더 아파야만 했던 사람들을 딛고 서 있다.

나는 1998년의 IMF를 어렴풋이 기억하고, 2002년 월드컵을 추억하고, 2014년의 세월호를 아파하고, 2016년의 이화여대와 광화문에 있었고, 2018년의 살인 더위를 서울에서 겪었다. 나보다 늦게 태어난 모든 여자들이 우리 세대의 삶에 난 생채기를 딛고 서서 지금보다도 더 큰 사랑과 덜한 폭력 속에서 살아가면 좋겠다.


그리고 은희가 되어 삶을 고백하고, 이렇게 의미 있는 영화를 너무나도 멋지게 만들어주신 김보라 감독님과, 아무도 네가 빛난다고 말해주지 않아서 빛을 찾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날갯짓을 해야만 했던 은희들도 더 나아진 세상을 누렸으면 좋겠다. 아직도, 아직도 한참 멀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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