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디서부터 어딜 향해 떠나가는가
날이 너무 습한 나머지 빨래가 마를 새가 없다. 에어컨이라도 잘 작동되었다면 급한 대로 그 힘을 빌려 빨래를 말려 보겠지만, 하필 이 와중에 ‘고장 난’이라는 형용사를 달아 버린 에어컨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가뜩이나 여름은 성수기인지라 A/S를 받으려면 한참을 대기해야 한다는 수리 기사님의 답변이 야속하기만 하다.
시간이 해결해 주겠거니, 하는 심정으로 꾸역꾸역 말린 빨래를 개고 있노라면 꼭 양말 한 짝이 없다. 싫증 나는 상황에 눈을 질끈 감은 것도 잠시, 이내 손에 들린 짝 잃은 반쪽을 내려놓고 다른 빨래를 이어 개기 시작한다. 언젠가 다시 찾게 될 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을 가진 채 말이다.
다음 날 아침이면 어김없이 세탁실 앞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양말 한 짝을 발견한다. 마치 제 주인이 다시 찾아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고이 몸을 기댄 채. 그럴 때면 필자 또한 안도감을 애써 숨겨 보이며 태연하게 몸을 숙여 양말을 줍는다. 그러고는 허공에서 괜히 한두 번 탈탈 털어 보이며 속으로 대차게 외쳐 보곤 하는 것이다.
역시, 어제 너무 깊이 고민하지 않길 잘했어!
필자는 평소에도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하는 고민이 아니라면 굳이 앞서 하지 않는 편이다. 물론 해결이 필요한 시점을 판단하는 데 있어 상당한 주관이 개입되기 마련이나, 어차피 인간이란 결코 객관적일 수 없는 동물이 아니겠는가.
어쩌면 인생을 살아간다는 건 ‘고민의 우선순위를 매기는 행위’와도 같다고 정의할 수 있을 듯하다. ‘사소한’ 고민이라면 후순위로 넘기되, ‘더 사소한’ 고민은 고민의 대상에서 삭제하는 행위의 반복. 결국 이것이 ‘망각의 동물’로서 생존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인 것은 아닐까. 말하자면 세탁 중 잃어버린, 그야말로 천 쪼가리에 불과한 양말 한 짝의 행방이 ‘더 사소한 고민’의 범주에 속하는 것처럼 말이다.
다소 가벼운 논증만으로 비교적 쉽게 결론을 도출한 듯 보일지도 모르겠으나, 사실 ‘고민의 우선순위를 매기는 행위’라는 표현에는 모든 인간이 지닌 고민의 경중이 각기 다를 수밖에 없음을 전제하고 있다. 타인이 고민의 우선순위를 부여하는 기준을 비판하거나 비평하지 말아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조금은 당연한 말이지만, 이 공식은 필자가 살고 있는 로컬에도 통용된다. 아무리 ‘귀촌’이라는 하나의 의지로 귀결해 이곳을 찾았다 할지라도, 서로 다른 고민에 서로 다른 기준으로 우선순위를 매기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마을 : 주로 시골에서, 여러 집이 모여 사는 곳.
도시는 물론이고, 이제는 시골에서도 쉽게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낡은’ 단어가 되어 버린 지금, 전국에 ‘청년마을’이라는 수상한 이름을 달고 생겨나는 특이한 마을들이 있다. ‘청년’이라는 수식과 결합되기엔 다소 상반된 성격을 가지고 있음에도, 젊음의 단어가 주는 힘인지 조금은 희망적인 미래를 그릴 수 있을 것만 같아진다.
이토록 특이한 ‘청년마을’의 존재는, 도시 대안적인 삶을 꿈꾸는 청년들의 귀촌을 유도하는 정책 하에 탄생했다. 우리의 뚜벅이마을 또한 그러한 추세에 동참하는 차원에서 만들어졌다고 설명할 수 있겠다. 전국 방방곡곡 구석구석에 위치한 청년마을들은 각자 고유한 특색을 살려 차별성 있는 프로그램을 활발히 운영 중에 있다. 그리고 해당 프로그램에 참여한 청년들은, 그를 기회로 삼아 로컬에 연착륙하여 그간 꿈꿔왔던 로컬 라이프를 실현하곤 하는 것이다.
잠깐의 살아보기 경험을 통해 어떻게 ‘귀촌’이라는 큰 도전을 실천으로 옮길 수 있냐고? 처음부터 귀촌을 결심하고 온 것이 아닐지라도, 적어도 도시를 벗어나 시골에 머물러 보고 싶다는 관심 하나로 출발해 로컬에 다다른 청년에겐 이보다 좋은 기회가 있을 수 없다. 본인이 위의 경우에 해당한다면 동감할 법하겠지만, 로컬은 아무런 연고가 없는 이에겐 실로 분명한 진입장벽이 존재하는 곳인 까닭이다. 가서 ‘잠시 지내 볼’ 계획을 세우기엔 외국보다도 막막하게 느껴지고 또 방법을 찾기도 어려운 곳이 바로 로컬이기에, 청년마을은 충분히 유의미한 해결책이 되어 주리라 생각한다. 필자 또한 그렇게 귀촌을 택한 경우에 해당하는 만큼, 청년마을에서 제공하는 살아보기 프로그램을 활용해 보는 것을 적극 추천하는 바다.
귀촌을 택한 지도 어느덧 1년이 넘어갈 즈음, 문득 주위를 돌아보니 어떤 청년들은 이미 떠나가고 없었다. 필자만의 방식으로 로컬을 즐기느라 다른 청년들의 흔들림에 눈을 돌릴 새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로컬에서의 하루하루가 쌓여갈수록 ‘왜 좀 더 일찍 귀촌할 생각을 하지 못했지?’라는 생각을 하던 필자와는 달리, 귀촌을 고민하며 그려왔을 청사진을 포기하고 다시금 도시로 향하는 청년들이 있었던 것이다.
필자는 그들의 선택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아야 마땅하다고 믿는다. 지자체의 인구정책과 소속이었다면 인구를 관리하는 일이 중요했을지 모르겠으나, 로컬에서 살아가는 또 다른 하나의 개인으로서 타인의 선택에 왈가왈부할 수 있는 자격은 어디에도 없지 않겠는가. 무엇보다도 위에서 언급했듯, 그저 고민의 우선순위가 다를 뿐이니.
그럼에도 함께 생활하던 이들과의 헤어짐을 마주할 때면 왠지 모를 아쉬움이 남는 것은 사실이다. 로컬에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필자가 고민할 수 있는 지점은 무엇일지에 대해 생각하다, 지면에 도시로 돌아가는 귀촌 청년들의 이야기를 적어 본다면 되려 귀촌을 고려하고 있는 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겠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그 관점이 지극히 주관적일지라도 말이다.
살다 보면 본인만의 기준이 생기기 마련이다. 흔히 본인만의 선(線)이 있다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돌이켜보면 필자에게도 몇 가지의 양보할 수 없는 선이 존재하는 듯하다. 맥주 없는 치킨이라든지, 신발을 구겨 신는 행위 정도를 예로 들 수 있지 않을까. 이토록 혼잡한 세상 속에서 수많은 상황을 마주하며, 나름의 좋고 싫음과 옳고 그름을 구분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며, 꼭 필요한 과정이라고도 생각한다.
로컬로의 발걸음을 뒤로하고 도시로 돌아간 청년들은 어떤 기준(선)을 지켜내지 못했던 것일까. 로컬의 여러 가지 특징 중 구체적으로 어떤 지점이 그들을 더는 용인하지 못하게 만들었는가에 관해, 감히 몇 가지 이유를 들어 추측해 보려 한다.
첫 번째 선(線), 문화생활
이전 화에서도 언급한 바 있듯, 필자의 경우 본래 도시에서도 그리 대단한 문화생활을 즐기지 않았다. 필자에게 있어 문화생활이라면 기껏 해봐야 주기적으로 서점에 방문하거나, 누워서 OTT 플랫폼을 활용해 영상을 보는 것 정도가 전부였으니 말이다. 오히려 로컬에 와서야 비로소 문화생활에 대한 갈증을 느껴 다양한 방법으로 문화를 향유하고자 여러 시도를 하고 있는 중이다. 반면 일부 청년들은 ‘문화 인프라 부족’으로 인해 선택지의 폭이 좁아진 것에 대해 불만을 호소하기도 했다. 지금 당장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훗날 가정을 꾸리게 된다면 자녀만은 문화 갈증에 허덕이지 않을 수 있는 환경에서 양육하고 싶다던 지인의 하소연을 기억한다. 이처럼 누군가에게는 문화의 풍요가 곧 포기하고 싶지 않은 자신만의 선일 수도 있을 테다.
지자체에서도 로컬의 문화 지체 현상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현재의 문제를 보완할 수 있는 해결책을 모색하고자 상당한 예산을 투자해 다양한 시도를 거듭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주기적으로 비상설영화관을 개방해 최신 영화를 상영한다거나, 도시에서라면 치열한 티켓팅을 거쳐야만 관람할 수 있는 유명 인사를 섭외해 초청 공연을 올리기도 하니까 말이다.
필자는 어째서 도시에선 거들떠볼 생각도 안 했던, 거들떠볼 엄두도 내지 못했던 문화생활에 이제야 욕심을 가지게 되었을까 곰곰 생각해 보니, 결국은 ‘여유’의 문제인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문화’는 자고로 플러스(+)의 요소가 되어야 하는데, 나날이 마이너스(-)로 치닫는 상황 속 원점에라도 머물기 위해 아등바등 애써야 할 땐 결코 욕심낼 수 없는, 너무나도 과분한 대상인 까닭이다. 시간과 공간을 포함한 물리적 여유부터, 경제적 여유 등은 차치하고 문화를 받아들일 내면적 여유가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두 번째 선(線), 외로움
‘당신은 외로움을 즐기시나요?’라는 질문에, 필자는 자신 있게 ‘그렇습니다.’라고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어디에 가서도 그 분위기에 맞춰 하하호호 웃고 떠들며 녹아들 수 있지만, 솔직히 말해 정말 마음이 통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밥도 혼자 먹는 것이 편하고, 맥주도 혼자 마시는 것이 가장 맛있다. 출생부터 대학 입학 전까지는 학창 시절을 줄곧 고향에서만 보내온 필자이기에, 현재 사는 로컬에는 지인이 그리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거의 느껴본 적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외로움의 벽을 넘지 못하고 로컬 생활을 포기하는 지인들의 고민을 접할 때면 그렇다 할 해결 방법을 찾지 못한 채 그저 고개를 끄덕여야 할 때가 잦았다. 좀 더 관심을 기울여서라도 그들의 외로움을 해소해 줄 필요성을 인식했음에도, 바쁘다는 핑계로 그러지 못했던 것은 아닌지 자책했던 경험도 있다. 하나, 그럴 때면 어김없이 얼마간의 고뇌에 빠지곤 했다. 로컬에서의 지속 가능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라면, 일시적인 방편은 그저 매력적인 독에 지나지 않으리라. 그렇다면 필자가 줄 수 있는 도움은 어디까지나 그들 스스로 경험하고 책임져야 할 몫을 빼앗는 아주 제한적인 유혹일 테다.
사회적 동물이라는 인간이 어찌 외로움을 조금도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무리 외로움을 잘 타지 않는 필자라지만, 축구라는 단체 운동을 함께할 만한 마땅한 커뮤니티를 찾지 못해 갈망했던 적이 있었다. 지금은 지역 축구 동아리에 가입해 동네 형님들과 사이좋게 공을 차고 있는 걸 생각하면, 외로움을 해결할 길은 어떻게든 찾으면 찾아지기 마련인 듯하다.
외로움이 극에 달해 로컬을 벗어나려는 욕구를 토로하는 지인에게는 적극적으로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추천하곤 하지만, 필자와 같이 그 정도가 경미할 때는 지역 커뮤니티를 찾아 여가생활을 즐기길 권하는 편이다. 적어도 외로운 감정을 느낀다는 건, 혼자보다는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더 행복해질 수 있음을 의미하니까. 혹시나 해서 덧붙이는 말인데, 지역 커뮤니티 구성원들은 대부분 활동에 매우 진심이기 때문에, 해당 분야의 전문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상치 못하게 성장의 원동력으로 삼을 수도 있는 유의미한 계기가 되어 줄지 누가 알겠는가?
외로움에 괴로워하는 이에게 외로움을 느끼지 말라고 요구하는 것은 그야말로 폭력에 가까운 언사다. 그러므로 공감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혹은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상황 자체를 외면하기보다는 또 다른 대안을 ‘함께’ 고민해 주는 것도 방법이다. 추위를 많이 타는 이에게 추위를 타지 말라고 요구한다면, 어쩐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지 않겠는가. 대신, 온도를 조금 높여 줄 수도, 옷차림을 두껍게 하길 권할 수도, 손난로를 건넬 수도, 따뜻한 차를 추천해 줄 수도 있다.
각자 다른 기준에 대해서는 충분히 존중해 주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많음을 기억하자.
세 번째 선(線), 일자리
서울에서 재직 중이던 직장을 그만두었을 때, 덜컥 학원에 등록해 제과 제빵을 배웠던 경험이 있다. 도시의 삶이 버거워질수록 시골로 홀연히 떠나 버리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하는가 하면, 동시에 무얼 하고 살 수 있을지에 관한 불안도 몰려왔던 탓에, 그야말로 홧김에 저지른 일이었다. 결국 머지않아 빵 자체에 그다지 흥미가 없는 필자 자신을 발견하곤 자격증 취득을 포기했지만, 단순한 해프닝이라기엔 ‘로컬의 삶’을 위해 어떻게든 한 발짝 나아가려 했던 첫 발걸음이라는 점에서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토록 무모하게 직업 훈련에 덤벼 들었던 필자는, 다행히도 그 후 젊은 감성을 자랑하는 문화 기획사에 취직했다. 다만, 만약 지금의 회사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과연 어떻게 로컬에서의 삶을 영위하고 있었을까 상상해 보곤 한다. 어쩌면 처음부터 로컬로 정착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고개를 세차게 내저을 뿐이다.
시골 특유의 한적함이 좋아서, 자연과 함께하는 삶이 그리워서, 도시의 번잡함을 떨쳐내고 싶어서 등등 청년들은 수도 없이 많은 이유를 들어 용기 있게 귀촌을 택하곤 한다. 마침내 그토록 꿈꾸던 로컬에 도달했을 때, 그들은 그간 도시에서 모아 온 금전을 소비하며 ‘할 일’을 찾으려 온갖 노력을 들이곤 한다. 그 과정 끝에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한 채 발걸음을 돌리는 경우를 볼 때면, 좋은 대책이랄 게 없을지 골똘히 고민해 보게 된다.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주변에 젊은 청년들을 원하는 일자리가 얼마나 많은데!
그런 데서 일하면 되는 거 아니야?
맞는 말이다. 다만, 로컬이라고 해서 원하는 일자리를 가질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고, 그렇다고 해서 원하지 않는 일을 감당해 내야 할 의무라면 더더욱 없다. 다시 말해 귀촌 후 진정한 만족을 찾기 위해서라면 적성에 맞는 일자리를 얻는 것이 당연하게도 아주 중요하다는 것이다. 로컬에는 그 수요를 충족시켜 줄 자원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기에, 이곳에 정착하는 청년들은 주로 ‘창업’이라는 소재를 택하곤 한다. 도시에 비해 확연히 적은 땅값과 유지비용, 그리고 지역의 특색을 반영한 아이템이란 장점을 살려 로컬이라는 블루오션에 도전하는 것이다.
로컬이나 도시나 그렇듯, 창업한 모두가 성공하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아마 이 사실은 창업을 결심한, 혹은 창업을 고민하는 로컬의 청년들이 더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협소한 시장 규모로 인해 고객 유치에 불필요한 어려움을 겪을까 걱정이라면, 온라인 시장을 공략해 사업을 확장하거나 다른 플랫폼과 연계해 오프라인 시장 진출을 고려해 볼 수도 있다. 모두가 반신반의한 창업 아이템이 성공을 거두듯 그 아무도 성패를 가늠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고, 그렇기에 잠재력을 함부로 제한할 필요도 없는 것이 바로 창업일 테다.
그런가 하면 디자인이나 번역 등 프리랜서로서 활동하는 이들도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부러워하는 부류이기도 한데,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조율해 가며 일할 수 있다는 점에서 특히나 그렇다.
로컬에도 셀 수 없이 다양한 방식의 경제 활동이 존재한다. 단, 인프라가 도시에 비해 현저히 부족한 로컬에서는, 정말이지 훨씬 더 정확하고 구체적인 노력을 요한다는 현실을 조심스레 전하고 싶다. 로컬의 한적함을 갈망해 귀촌을 준비하는 과정은 더욱이 치열해야 한다는 아이러니한 논리.
그렇다. 어쩌면 로컬은 도시보다는 조금 더 역설적인 공간일 수도, 매일같이 선을 위협받고 또 조율하길 반복해야 하는 공간일 수도.
그저 좋은 사람들과 좋은 환경에서 오랜 기간 함께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 때문일까. 갖가지 이유로 로컬을 떠나가는 청년들을 볼 때면 늘 마음 한 구석이 무겁기만 하다.
그래서, 우리는 그 뒷모습을 이정표로 삼아 ‘떠나는 이들을 위해 무얼 할 수 있을지’ 고민하곤 한다.
뚜벅이마을의 성장이, 로컬의 파란으로부터 그들의 선(線)을 지켜 줄 수 있는 방파제가 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