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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만두 한 주먹 Oct 30. 2022

[21세기 원시인]  
ep 13. 원시인의 회고록

우리가 기억하고 싶은 장면은 무엇인가

1) 가을은 고백의 계절이니까


10월의 끝자락, 바야흐로 가을이다. 어디서 불어와 어디로 향하는지 모를 바람을 따라 크게 숨을 들이마시면 은근한 겨울 냄새가 묻어나는 듯하다가도, 아직 가지 않은 지난 계절이 제 존재를 과시하는 듯 여름과 다를 바 없는 뙤약볕이 옷차림을 멋쩍게 하는, 그런 계절. 어떨 때 계절의 변화를 실감하느냐는 물음이 무의미해지는 요즘이다.


많은 사람들이 시골은 느릿느릿 천천히 흘러갈 거라 예상하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한때는 필자 역시 아무런 의심도 없이 도시가 세상의 중심이고 전부인 줄로만 알았기에, 그러한 추측이 어떤 이미지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이해는 한다. 그러나 이곳도 다를 바 없이 분주하다. 하루하루가 가는 줄 모르는 채 한 달을 보내고, 또 몇 달이 지나서야 기어이 연말이 찾아옴을 실감한다. 큰 단위의 시간에 매여 살다 보면 1분 1초라는 작은 단위는 쉽게 잊어버리고 만다. 


다만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그 ‘작은 단위의 시간’ 속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작은 단위의 존재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일상 속에 녹아들어 언제든지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은, 끊임없이 그것을 자각하지 않으면 놓쳐버리기 쉽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이러한 종류의 소중함을 잃지 않기 위해 로컬로 왔는데, 여기서마저 그것을 놓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할 때면 괜스레 조금 슬퍼지기도 한다.      


어쨌거나, 일상을 살아내기 바빠 글 쓰기를 미뤄왔던 것이 사실이다. 일종의 게으름 앞에서는 어떠한 핑계도 먹히지 않을 것을 안다. 얼마나 오래되었건 그동안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있었다는 뜻일 테니까. 글을 쓰지 않는 동안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면, 이 몇 편의 글이 필자로 하여금 로컬의 삶의 이유를 찾고 되새기게 해 주었다는 점이다. 독자들을 위해 쓰고 있었다고 생각했건만, 필자 자신에게 또 다른 의미를 선물해 주고 있었다니. 조금은 뜻밖의 결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이 연재되지 않는 동안 새로운 글을 기다리고 있다는 연락이,
발행을 독촉하는 브런치의 알림이,
오래 전의 글에 달리는 댓글이,
많지는 않더라도 꾸준히 찍히는 조회수가,
같은 고민 끝에 적어 넣었을 검색어가,
어디서 유입되었는지 모를 팔로우가,

이 모든 게 전부 ‘의미’가 되어 주었다. 용기 내어 다시 쓰기를 택할 명분이 되어 주고 있었다.



2) Go Back 하건대,


<21세기 원시인>의 연재를 처음 시작할 때, 로컬의 수많은 모습 가운데 무얼 보여 줘야 하느냐에 관한 논의가 뜨거웠다. 우리는 모두 같은 로컬에 살고 있는데도 저마다 다른 로컬의 ‘경쟁력’을 내세우는 걸 보며 각자 나름의 이유로, 또 방법으로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느끼기도 했다. 제목은 ‘21세기 원시인’이라 지어놓고 더 근사한 면을 보여 주기 위해 발을 동동 구르던 것을 생각하면, 막연하게 독자들이 궁금해하고 기대할 만한 것은 ‘대단한’ 시골이어야 한다는 남모를 부담감에 시달렸는지도 모르겠다.      

<21세기 원시인>의 시작


그러나, 최근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로 하여금 이토록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일상 속의 작고 작은 순간들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 말이다. 우리조차 잊을 때가 많은, 그래서 더욱 부단히 잊지 않으려 노력해야 하는 평범하고 특별한 것들.     


언젠가 어떤 이유로 로컬을 떠나게 되었을 때,
무슨 장면이 가장 먼저 떠오를 것 같아?


‘마지막’은 잊고 있던 특별함을 발견하게 하는 단단한 힘이 있다. 

무뎌진 순간들 속에서 가장 밝게 빛나고 있는 무언가를 기어이 찾아내게 하는, 신비한 능력이 있다.


단순한 가정만으로 곰곰 머릿속의 수많은 순간들을 톺아보게 되는 것도 그 까닭일 테다. 

상상해 본 적 없던, 상상하지 않으려 했던 헤어짐의 순간을 가늠해 보려니 절로 애틋한 감정이 피어오른다. 

오직 이곳에서만 가능한 것, 그러니까 이곳이 아니면 말이 되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 순간 별 수 없이 깨달았다. 우리를 살게 하는 것들은 하나같이 작은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을.      

조금 늦었지만, 더 늦기 전에, 이제야 우리의 시골을 완성하는 고마운 존재들을 소개한다. 


이들 모두는 조연이 아닌 주인공이라고 믿는다.



3) 


이른 저녁의 장작 타는 냄새
골목골목 늘어져 오후의 햇빛에 몸을 데우는 고양이들
정자에 누워 청하는 달콤한 낮잠
아쉬워질 때쯤 찾아오는 장날의 적당한 북적거림
아침을 깨우는 동물 친구들의 울음소리
평상에 앉아 바라보는 밤하늘의 별
풀려 있는 신발끈은 그냥 두고 볼 수 없다는 기분 좋은 잔소리
걱정할 일 없게 알아서 잘 좀 해 보라는 서툰 응원
언제든지 도망칠 수 있는 바닷가
부지런히 한결같은 산     


사람은 문득문득 떠오르는 기억의 조각을 붙잡고 평생을 산다고들 한다. 

우리를 살게 하는 건, 실은 아주 작고 단편적인 장면들이니. 


먼지 한 톨에도 무너지는 마음이라면 바람 한 점에도 행복해질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다. 당신은 지금,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은 가을의 한가운데 서 있는지도 모른다. 

곧 시린 겨울이 다가올 걸 알고도 가만히 서서 괜히 발가락에 힘을 주고 있는지도. 


이제는 당신의 차례라고 선뜻 말해 주고 싶다. 

잠자리에 누워 하루를 마칠 때, 머지않아 찾아올 연말을 맞이했을 때, 지금 머무르던 공간을 떠나게 되었을 때, 언젠가 세상을 뜨게 되었을 때, 어떤 장면이 가장 먼저 떠오를 것 같은가?     


<21세기 원시인>을 읽으며 누군가 이토록 편리한 21세기에 기어이 원시인을 자처해 살고 있는 이유를 납득하게 되었을 수도, 더욱더 궁금해졌을 수도, 조금은 부러워했을 수도 있을 테다.  앞선 질문에 대한 답을 내릴 수 있는 것은 당신뿐이다. 모든 것이 당신에게 달려 있다는 축복밖에는 건넬 수가 없다.      

매달, 매일, 매 시간, 매 찰나 깨닫는다. 여전히 ‘처음’인 것이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을.

아직 해야 할 말이, 쓰고 싶은 이야기들이 너무 많이 남아 있음을 느낀다.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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