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직

글로벌 지능 위기 이후의 사람들

by 왈로비
1. 모니터 앞의 일들

먼저 흔들린 것은 모니터 앞에서 하던 일이었다.


보고서, 계약서, 기획안, 번역, 코딩, 디자인, 작곡, 설계.

컴퓨터 앞에 앉아 만들 수 있는 것들, 말과 글을 비롯해 파일로 저장되고 전송될 수 있는 거의 모든 일들.


오랫동안 그런 일은 사람의 시간과 집중을 필요로 했다. 누군가 오래 생각하고, 써보고, 지우고, 다시 고쳐야 했다. 그래서 직업이 되었고, 월급이 되었고, 어떤 사람들에겐 자부심이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 순서가 뒤집히기 시작했다.


사람이 먼저 만들고 기계가 돕는 것이 아니라, 기계가 먼저 만들고 사람이 뒤늦게 들여다보는 식으로.

빈 문서를 열고 시작하는 대신, 이미 채워진 문장을 고치는 일이 늘어났다.


한국의 실리콘밸리인 판교는 무너지지 않았다.


다만, 필요를 잃어 갔다.


윤태성은 그 사실을 꽤 일찍 알아챈 사람 중 하나였다. 40대 초반의 자동차 회사 사내변호사.

판교역에서 조금 떨어진 아파트에 살았다. 출근길엔 유리 건물 사이로 커피를 든 사람들이 빠르게 걸었고,

저녁이면 어린아이 보다 노트북 가방이 더 많이 보이던 동네였다.

판교는 오래도록 한국에서 미래를 가장 비싸게 파는 곳 같았다.


태성과 지안이 그 아파트를 살 때만 해도 숨이 턱 막힐 만큼 비쌌다.

그런데 몇 년 지나지 않아 같은 평형 매물이 이십억을 훌쩍 넘는 걸 부동산 앱에서 보게 됐다.

그는 처음엔 그 숫자를 믿지 못했고, 나중에는 믿고 싶어 했다.

숫자는 사람이 기대를 걸기 시작하면 아주 빠르게 신앙이 된다.


주식도 비슷했다. 엔비디아, 마이크로소프트, 알파벳, 테슬라 같은 이름들은 한동안 기술기업이 아니라 신호처럼 움직였다.

비트코인은 원화 기준으로 억 단위를 넘나들었다.

태성은 처음에는 조심했지만, 나중에는 조심스럽게 낙관적인 사람이 되어 갔다.

조심과 낙관은 자산이 오를 때 아주 잘 섞인다.


그의 아내 서지안은 숫자보다 문장을 먼저 보는 사람이었다.


출판사에서 오래 일했다.

원고를 읽고, 문장을 다듬고,

책의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을 붙들고 사는 편집자였다.

태성이 지안을 좋아한 이유도 그 말들이었다.

지안은 말을 예쁘게 하는 사람이었다.

사람을 다치게 하지 않으면서도 오래 남는 쪽의 말을 할 줄 알았다.


하지만 첫째가 태어나고, 둘째까지 생기자 더는 회사를 계속 다닐 수 없었다.

출판사는 늘 급했고,

아이들은 늘 느렸다.

아이들은 밥을 먹다 갑자기 울고,

낮잠을 자다 깨고,

저녁에 열이 나고,

새벽에 토했다.

회사는 그런 리듬을 견디지 못했다.

결국 지안이 먼저 그만두었다.


“회사 다니는 건 문장처럼 고칠 수가 없더라.”


퇴사한 날 지안이 그렇게 말했다.


아이들은 둘이었다. 서우와 하린.

그 집에는 개도 한 마리 있었다.


구름이.


라떼 색 말티푸였다.

이제 막 한 살이 된, 삼 킬로짜리 작은 개.

가슴과 발등에만 흰 털이 남아 있어서

누가 조심스럽게 크림을 찍어 놓은 것처럼 보였다.


“얘는 너무 귀여워서 현실감이 없다.”


입양하고 나서 지안이 가장 먼저 한 말이 그거였다.

태성은 동의했다.

구름이는 너무 작아서 가끔 집 안에서 사라졌다가

소파 쿠션 옆이나 세탁 바구니 아래에서 발견되곤 했다.

그런데도 존재감은 분명했다.

집 안 분위기가 흐려지면 먼저 눈치를 봤고,

누군가 웃으면 제일 먼저 꼬리를 흔들었다.

집 안의 기분을 가장 빨리 읽는 생명체는 늘 강아지였다.


주말 저녁이면 지안은 아이들과 구름이를 데리고 산책을 나갔다.

태성은 그 시간에 종종 부동산 앱을 열어

같은 동, 같은 평형, 같은 방향의 호가를 확인했다.

이미 자기 집인데도

남의 집 사진처럼 확대해서 보았다.

사람은 돈이 되는 것 앞에서 늘 약간 낯설어진다.


“당신 또 보지?”


지안이 어느 날 물었다.


“뭘?”


“우리 집 시세.”


“확인만 하는 거지.”


“시세를 확인하는 사람 표정이 아니야.”


태성은 웃었지만 부정하지 않았다.

지안은 출판사에 다닐 때도 사람의 문장을 잘 읽었고,

아이를 낳은 뒤에는 사람의 표정을 더 잘 읽게 됐다.

아직 정확한 말로 설명하지 못하는 존재와 오래 살다 보면,

사람은 결국 말 바깥의 것을 먼저 읽게 된다.


태성은 회사에서 법률 자문을 맡고 있었다. 계약서 검토, 리스크 점검, 신사업 법률 검토, 해외 규제 대응.

몇 년 전만 해도 꽤 비싼 일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회사는 태성의 머리보다 시스템을 더 믿기 시작했다.

법률 AI가 계약서를 먼저 읽고, 쟁점을 뽑아내고, 초안을 만들고, 참고 판례까지 붙였다.

태성은 그 결과물을 검토하는 사람이 됐다.

예전엔 빈 문서를 열고 시작했다면, 이제는 이미 채워진 문장을 지우고 고치는 쪽에 가까웠다.


처음엔 편했다. 일이 빨라졌고, 퇴근도 조금 빨라졌다.

문제는 속도가 늘어나면 회사가 사람에게 여유를 주는 대신 일을 더 준다는 데 있었다.


더 빠르게 검토하라.

더 많은 프로젝트를 동시에 보라.

더 적은 인원으로 더 넓은 범위를 맡아라.


AI가 일을 줄여 준 게 아니라, 회사의 기대치를 늘려 준 셈이었다.


그러면서도 집값은 올라가고, 주식도 오르고, 코인은 더 오르는 시절이었다.

불안은 돈이 오를 때 가장 교묘한 방식으로 숨는다.


그 무렵 지안은 아이들을 재우고 남은 꽃 몇 송이를 유리잔에 꽂았다.

출판사를 그만둔 뒤에도 지안은 글을 완전히 떠난 적은 없었다.

다만 종이 대신 꽃으로 옮겨 간 것에 가까웠다.

꽃도 편집과 비슷하다고, 그녀는 말했다.

너무 많은 색을 빼고, 너무 긴 줄기를 자르고, 함께 있을 때 더 좋아 보이는 것을 골라 한 다발로 묶는 일.

출판과 닮았고, 육아와도 닮았다.


“나 꽃집 하면 이름 정했어.”


“벌써?”


“응.”


“뭔데?”


지안이 꽃병에 물을 조금 더 채우고 말했다.


“Jian’s Daily Flowers.”


태성이 이름을 한번 입안에서 굴려 보듯 따라 말했다.


“생각보다 담백하네.”


지안이 웃었다.


“응. 특별한 날에만 꽃 사는 분위기 말고, 그냥 평범한 날에도 꽃 한 다발 사서 집에 두고 싶은 사람들 있으면 좋겠어.”


간판 아래 들어갈 짧은 문장도 이미 정해져 있었다.


특별한 날의 꽃보다, 평범한 날의 기분을 조금 밝혀 주는 꽃.

비싸지 않아도 일상에 작은 행복을 들여놓는 꽃집.


태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하면, 그때의 그는 그 꿈을 예쁘지만 비수익적인 취향쯤으로 생각했다.


사람은 대개 자기 삶을 무너뜨릴 것이 무엇인지보다, 자기 삶을 지탱할 것이 무엇인지 더 늦게 알아본다.




2. 구름이가 먼저 인사했다

그 아파트 사람들은 서로를 잘 몰랐다.


경비원에게는 인사했지만 옆집과는 눈을 마주치지 않았고,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면 휴대폰 화면을 먼저 봤다.

택배는 문 앞에 놓였고, 음식은 비대면으로 도착했고, 아이들은 놀이터보다 실내 프로그램을 더 많이 경험했다.

사람들은 안전했고 편리했다.

다만 지나치게 편리한 사회는 종종 이웃을 불필요한 존재처럼 만든다.


지안은 그 분위기를 오래 이상하게 여겼다.


“한 건물에 수백 명이 사는데, 이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게 더 이상하지 않아?”


태성은 늘 비슷하게 대답했다.


“다들 바쁘니까.”


“바쁜 건 알겠는데, 꼭 익명으로 살아야 편한 얼굴들이 있어.”


지안은 누구를 미워하듯 말하지 않았다.

그저 이상하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어린아이 둘과 강아지 한 마리를 돌보는 사람은 감정을 오래 낭비할 수 없었다.


그래도 이름이 오가는 곳이 아주 없던 건 아니었다. 단지 초입의 동네 미용실, 고연아 헤어가 그랬다.

연아는 예전에 이대 앞에서 오래 가위를 잡았던 사람답게, 애써 힘준 티는 없는데도 머리가 꼭 제자리를 찾은 것처럼 세련돼 보이게 잘랐다.


어느새 태성과 지안은 물론이고, 서우와 하린까지 그 집 식구의 머리는 다 연아 손을 거쳤다.

원래 아이 손님은 잘 받지 않는다고 했지만, 서우와 하린이 오면 “얘네는 내가 그냥 귀여워서 받아”하며 먼저 의자를 비워 주곤 했다.


한 번은 지안이 서우를 의자에 앉혀 놓고, 거울 너머로 움직이는 연아의 손놀림을 한참 보고 있다가 말했다.


“이런 일은 그래도 기계가 금방 못 하겠네.”


연아는 빗으로 서우 앞머리를 가지런히 모으며 웃었다.


“머리만 보면 그렇지. 근데 이건 머리만 자르는 일이 아니거든. 머릿결도 봐야 하고, 얼굴형도 봐야 하고, 오늘 이 애가 얼마나 가만히 있을 수 있는지도 봐야 해. 같은 앞머리라도 울기 직전 얼굴에 자르는 거랑 신나서 들어온 얼굴에 자르는 게 다르잖아.”


그러고는 서우 고개를 손끝으로 가볍게 바로 세우며 덧붙였다.


“사람들도 머리만 자르러 오는 거 아니고. 누가 자기 얼굴을 제대로 한 번 봐 주는 날도 필요한 거지.”


지안은 거울 속 자기 얼굴을 잠깐 바라보다가 조용히 웃었다.


미용실 한쪽에는 한때 삽살개 자두가 있었다.

몸집은 컸지만 성질은 놀랄 만큼 느긋하고 순한 강아지였다.


자두가 바닥에 길게 누워 있던 시절, 고연아 헤어는 온 동네 강아지들의 마실 같은 곳이었다.

산책 나온 강아지들이 한 번씩 문 앞에 멈춰 섰고, 어떤 날은 주인보다 먼저 안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자두가 하늘나라로 간 뒤에도 그 버릇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강아지들은 가끔 그 앞에서 걸음을 늦추고, 문턱 근처 냄새를 한 번 맡은 뒤 다시 걸어갔다.

오래 머물던 체온과 냄새는, 없어진 뒤에도 한동안 자리를 비우지 않는 법이었다.


변화는 늘 작은 존재가 먼저 만든다.

그 집에서는 구름이가 그 역할을 했다.


초여름, 맞은편 동에 신혼부부가 이사 왔다.

이삿짐 트럭이 빠지고도 현관 앞엔 커다란 박스들이 한동안 쌓여 있었다.

그 부부는 보기 드물게 유쾌한 사람들이었다.

남편은 커다란 가전을 들고도 계속 웃었고, 아내는 현관 비밀번호를 잘못 눌러 놓고도 깔깔 웃었다.

그들 옆에는 커다란 하얀색 진돗개 한 마리가 서 있었다.


아직 아기 티가 남아 있는 진돗개였다.


다리는 길고 발은 유난히 컸다.

몸집은 이미 컸지만 눈빛은 아직 덜 자란 개의 것이었다.

호기심이 많고, 사람을 좋아하고, 자기 몸이 얼마나 큰지 잘 모르는 얼굴.

이름표에는 ‘곰이’라고 적혀 있었다.


첫날 산책에서 그 부부는 몇 번이나 사람들에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지만 돌아오는 건 대개 짧은 고개 끄덕임 정도였다.

곰이가 먼저 다가가 꼬리를 흔들어도, 사람들은 강아지를 잠깐 보고 지나갔다.

개를 싫어해서가 아니라, 굳이 낯선 삶에 발을 들이고 싶지 않은 표정들이었다.


그날 구름이는 평소보다 앞장서 걸었다.

작은 몸으로 통통 뛰다가 갑자기 멈추더니 곰이 쪽으로 곧장 갔다.

지안은 줄을 잡은 채 웃었다.

작은 개가 먼저 큰 개의 냄새를 맡고, 큰 개는 몸을 한참 낮춰 그 작은 존재의 인사를 받았다.


잠깐 정적이 있었다.

그리고 곰이가 조심스럽게 앞발 하나를 내밀었다.


그게 끝이었다.

친구가 되는 데는 원래 복잡한 절차가 없다.

서로 냄새를 맡고, 위협이 없다는 걸 알면 된다.

나머지는 인간들이 어렵게 만드는 편이다.


“어머, 얘가 먼저 인사하네.”


곰이 주인인 여자가 웃으며 말했다.


“원래 좀 적극적이에요.”


지안이 말했다.


“저희도 이런 친구 필요했어요.”


남편이 곰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이름은 박정우, 아내는 최다혜라고 했다.

정우는 작은 스타트업에서 서비스 기획 일을 했고, 다혜는 결혼 전까진 전시 기획 일을 했다고 했다.

둘 다 말 끝이 환하게 올라가는 사람이었다.

무거운 이야기도 조금 가볍게 건너가게 만드는 사람들.


“이 동네 되게 조용하네요.”


다혜가 말했다.


“좋게 말하면요.”


지안이 웃었다.


“좋게 말하면 조용하고, 나쁘게 말하면 각자 너무 잘 살죠.”


다혜가 그 말을 듣고 크게 웃었다.

그 웃음이 마음에 들어서, 지안은 곧바로 물었다.


“커피 드실래요? 저희 애들 산책 끝나면 잠깐 벤치에 앉아 있어요.”


그날 이후 네 사람과 두 마리 개는 종종 마주쳤다.

아니, 정확히는 두 마리 개가 먼저 친해졌고, 그 덕에 사람들이 말을 하게 됐다.


구름이는 자꾸 곰이 발치로 뛰어갔고, 곰이는 그런 구름이를 아주 참을성 있게 기다려 줬다.

구름이가 짖으면 곰이는 고개를 갸웃했고, 구름이가 달리면 곰이는 몸을 낮춰 천천히 따라왔다.

서우는 그걸 보고 말했다.


“곰이는 큰데 착해.”


하린은 아직 또렷한 문장이 짧아서 “곰이!”만 여러 번 불렀다.


정우와 다혜는 보기 드물게 자기 이야기를 숨기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정우는 회사에서 다들 AI를 붙여 일하는 바람에 자기 업무가 줄어드는 게 아니라 사라지는 중이라고, 웃는 얼굴로 말했다.


“이제 회의도 AI가 먼저 정리하고, 기획서 초안도 AI가 뽑고, 시장 조사도 AI가 해 줘요. 저한테 남은 건 수정 의견 내는 건데, 그것도 점점 줄겠죠.”


그는 말하면서도 그 심각함을 완전히 믿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인간은 자기 일이 없어지는 걸 체감하면서도, 막상 없어지기 전까지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려는 습관이 있다.


지안은 그런 정우를 보면서도 굳이 위로하지 않았다.

대신 다혜에게 물었다.


“이 동네 어때요?”


다혜는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좋은데, 너무 다들 잘 살 것 같아서 조금 불안해요. 잘 살아 보이는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내가 잘 못 사는 날은 숨기고 싶어 지잖아요.”


지안은 그 말이 좋았다.

정확하기보다, 예쁜 문장이었다.

사람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도 핵심을 건드리는 쪽의.


그날 저녁 지안은 태성에게 말했다.


“맞은편 동 새로 온 부부, 괜찮더라.”


“친해졌어?”


“친해졌다기보다, 인사하게 됐지.”


“그게 뭐가 달라?”


“많이 다르지. 인사는 맺는 거고, 친해지는 건 시간이 하는 거니까.”


태성은 그 말을 흘려듣는 척했지만 마음속 어딘가에 남겨 두었다.

지안은 원래 그런 말을 자주 했다.

그 자리에서는 대수롭지 않아 보여도, 나중에 오래 남는 말들.


인사가 관계가 되는 순간을 태성이 조금 실감한 건, 아이들과 경주 여행을 다녀오기 전이었다.


구름이를 맡길 곳이 마땅치 않아 둘이 며칠째 방법을 못 정하고 전전긍긍하던 날, 지안은 서우 앞머리를 다듬으러 들른 고연아 헤어에서 그 걱정을 무심코 꺼냈다.


연아는 가위를 잠깐 멈추고 거울 너머로 지안을 보더니 말했다.


“데리고 와요. 내가 볼게.”


그 말은 너무 쉽게 나와서, 오히려 지안이 더 잠깐 말을 잃었다.


그 며칠 동안 연아는 구름이를 아침저녁으로 산책시켰고, 미용실 바닥에 엎드려 졸고 있는 사진이며 햇볕 드는 문 앞에 얌전히 앉아 있는 사진을 틈틈이 보내 왔다.


어느 날은 자두가 늘 누워 있던 자리에서 구름이가 동그랗게 말려 잠든 사진도 왔다.


둘은 경주에 내려가서도 그 사진을 볼 때마다 마음이 놓였다.


사람은 큰 도움보다도, 자기 걱정을 누가 대수롭지 않게 덜어 주는 순간을 더 오래 기억하기도 했다.





3. 18개월

세원모빌리티 전사 타운홀은 늘 비슷했다.


대표가 무대에 올라와 “전환”과 “혁신”을 말하고, 스크린에는 올라가는 화살표가 뜨고, 직원들은 그 그래프보다 대표 표정을 먼저 읽었다.

진짜 숫자는 늘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더 뽑을지보다, 얼마나 덜 남길지가 더 중요해진 시대였다.


그날도 비슷했지만 분위기는 조금 달랐다.


며칠 전, 마이크로소프트 AI 부문 수장이 인터뷰에서 말했다.

앞으로 12개월에서 18개월 안에, 화이트칼라 업무의 상당수가 자동화될 거라고.

사람들은 기사 링크를 사내 메신저에 돌렸다.

누군가는 과장이라고 했고, 누군가는 실리콘밸리식 허세라고 했다.

태성은 그 반응들보다 침묵하는 사람들을 더 오래 봤다.

대개 먼저 사라질 직군일수록 웃음이 적었다.


타운홀 시작 전, 옆 부서 개발팀에서 작은 소동이 났다.

코드 생성 에이전트가 몇 시간째 먹통이었다.


예전 같으면 서비스 장애쯤으로 넘길 일이었는데, 지금은 다들 표정이 진지했다.

모니터를 보던 개발자들이 동시에 커피 머신 앞으로 몰렸고, 어떤 사람은 “이제 손으로 짜야 하나” 하고 웃었지만 웃는 얼굴이 아니었다.

태성은 그 장면이 이상하게 오래 기억에 남았다.

사람들이 도구를 잃은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손발 일부를 잃은 것처럼 보였다.


타운홀에서 대표는 말을 아꼈다.

아낀 말속에 뜻이 더 많았다.


간접 부문 조직 재정비.

생산성 향상.

중복 기능 통합.

선택적 전환 지원.


그리고 마지막에, 희망퇴직.


조건은 꽤 좋았다. 최대 오년치 연봉.

사람들은 오히려 그게 불길하다고 느꼈다.

회사가 이 정도 돈을 주면서까지 빨리 정리하고 싶다는 뜻이니까.


회의가 끝나자 법무팀 채팅방이 조용해졌다.

잠시 뒤 후배 한 명이 메시지를 올렸다.


— 형, 이거 진짜일까요?


태성은 답하지 않았다.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를 걸었다.


창밖으로 판교의 유리 건물들이 보였다.

저 건물들 안에서 매일 수천 개의 문장과 코드와 리포트가 생산되고, 검토되고, 폐기된다.

한때 그 안의 사람들은 자기 일의 지적 난이도를 자부했다.

하지만 난이도는 AI에게 오래 버티는 방패가 아니었다.

오히려 규칙이 분명하고, 화면 안에서 끝나고, 파일로 바뀔 수 있는 일일수록 먼저 잡아먹혔다.


네 시 정각, 희망퇴직 신청 시스템이 열렸다.


태성은 바로 접속했다.

사번을 넣고, 본인 인증을 하고, 전자서명을 했다.

사유란에는 잠깐 커서를 두었다가 “개인적 진로 설계”라고 적었다.


신청 번호가 떴다.


1번.


그는 잠시 숨을 내쉬었다.

후배가 옆자리에서 모니터를 보고 말했다.


“형, 벌써요?”


“응.”


“조금 더 고민해 보시지.”


태성은 화면을 닫으며 말했다.


“고민할 시간이 돈으로 환산되는 시기야.”


후배는 그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태성은 설명하지 않았다.

그는 변호사였고, 회사의 구조조정 문구가 어떻게 변해 가는 지 오래 봐 왔다.

지금은 오년치 연봉. 다음엔 삼 년치. 그다음엔 일 년치.

그리고 어느 날엔 법원 판결 몇 줄이 바뀌면서 회사는 더 적게 주고도 더 많이 내보낼 수 있게 될 것이다.

세상은 늘 급격히 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제도를 통해 아주 합법적으로 나빠진다.


집에 돌아와 그 얘기를 했을 때, 지안은 생각보다 놀라지 않았다.


“몇 번?”


“1번.”


“당신답네.”


“그게 끝이야?”


“아니. 잘했어.”


태성은 그게 위로인지 판단인지 알 수 없었다.

지안은 늘 말을 길게 하지 않았다.

편집자는 아는 척하는 말보다 정확한 톤이 중요하다는 걸 안다.


저녁 식탁에서 서우는 김을 먹다가 물었다.


“아빠 회사 안 가?”


“당분간은 덜 갈 거야.”


“좋겠다.”


서우는 진심으로 말했다.

아이에게 회사는 부모를 빼앗아 가는 곳에 가까웠다.

하린은 뜻도 모르고 “아빠 집” 하고 따라 했다.

구름이는 그 분위기가 좋은 쪽인지 나쁜 쪽인지 모르겠다는 듯 일단 꼬리를 흔들었다.


그날 밤 지안이 물었다.


“무섭지?”


태성은 부정하려다가 그만뒀다.


“응.”


“돈 때문에?”


“돈도 그렇고. 직업이 없으면, 내가 갑자기 흐릿해지는 느낌이 들어.”


지안은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직업이 사라진다고 사람이 흐려지는 건 아닌데, 사람들은 오래 그렇게 배워 왔지.”


“쉽게 말하네.”


“쉽지 않아. 나도 회사 그만두고 한참 그랬어.”


태성은 그때 처음으로, 아내가 자기보다 먼저 그런 공포를 통과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우리는 괜찮을 거야. 집도 있고, 자산도 있고.”


지안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 조용히 말했다.


“이런 일은 한 번으로 안 끝나. 시작이 대부분 예고편이더라.”


태성은 웃었다.

그땐 그 말이 그저 비유인 줄 알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았다.


그것은 비유가 아니라, 이미 시작된 구조의 변화였다는 것을.




4. Jian’s Daily Flowers

퇴직금이 들어온 날, 태성은 숫자를 오래 들여다봤다.


숫자는 친절했다. 은행 앱은 언제나 명확했다.

얼마가 들어왔는지, 지금 얼마가 남았는지, 앞으로 얼마를 움직일 수 있는지.

숫자는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차분했다.

사람만 불안했다.


지안은 그 돈 앞에서 예상보다 담담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히 말했다.


“나는 이걸로 당신이 다시 예전 자리 흉내 내는 데는 안 썼으면 좋겠어.”


“무슨 말이야?”


“겉으로만 그럴듯한 사무실 차리고, 결국 AI보다 비싸고 느린 자문을 팔려고 버티는 거.”


태성은 기분이 상했다.


“그럼 뭘 하라고?”


“진짜 남는 걸 해.”


지안은 그 말을 하고 멈췄다.

아무리 부부라도 남의 공포를 대신 통과해 줄 수는 없었다.


결국 둘은 돈을 크게 세 덩이로 나눴다.

생활비와 예비비, 그리고 작은 시도.

그 작은 시도로 지안은 꽃집을 열기로 했다.


상가 자리는 크지 않았다.

예전엔 수제 디저트 가게였고, 그전엔 반찬가게였다.

판교의 상가들은 사람보다 가게가 더 빨리 바뀌는 곳이었다.

지안은 그 자리가 좋다고 했다.

큰돈을 쓰지 않아도 되고, 지나가다 들를 수 있고, 너무 반짝이지 않아서 좋다고.


간판은 영어로 달았다.


Jian’s Daily Flowers


가게 소개 문구도 직접 썼다.


특별한 날의 꽃보다, 평범한 날의 기분을 조금 밝혀 주는 꽃.

비싸지 않아도 일상에 작은 행복을 들여놓는 꽃집.


출판사 편집자 출신답게 소개 문장은 짧고 정확했다.

아니, 정확하다기보다 예뻤다.

읽는 순간 마음이 조금 느슨해지는 쪽의 문장이었다.


가게는 처음부터 잘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전혀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출근길에 작은 다발을 사 가는 사람, 아이 발표회가 있다고 한 송이만 고르는 사람, 집에서 재택근무를 하다가 눈이 너무 피곤해서 초록 소재를 한 줌 사 가는 사람, 장을 보고 돌아오다 그냥 꽃 한 다발이 눈에 들어와 멈추는 사람.

거창한 손님은 아니었지만 의외로 꾸준했다.

지안은 그게 좋았다.


“꽃은 원래 너무 비쌀 필요가 없어. 너무 비싸지면 꽃이 아니라 긴장감이 되거든.”


그녀는 가끔 그렇게 말했다.


태성은 처음엔 자신의 온라인 법률 자문 페이지를 정성껏 꾸몄다.

기업 자문, 계약 검토, 분쟁 예방.


문장은 누구보다 매끈했다.

문제는 매끈한 문장이 더 이상 희소하지 않다는 데 있었다.

문의는 왔지만 대부분 가격에서 멈췄다.

사람들은 이미 AI 법률 서비스에 익숙했다.


“기본 검토는 AI로 돌려 봤는데요.”


그 말이 인사처럼 붙었다.


지안은 서우를 유치원에 보내지 않았다.

일곱 살까지는 직접 키우고 싶다고 오래전부터 말해 왔다.

사람들은 사회성이 걱정된다고 했지만, 지안은 가장 먼저 배워야 할 것은 또래보다 부모의 리듬이라고 생각했다.

하린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아직 온전히 집의 시간이 필요한 아이였다.


그래서 지안의 하루는 늘 아이들과 붙어 있었다.

책을 읽고, 꽃을 만지고, 구름이 산책을 시키고, 마트에 가서 딸기 값을 같이 보고, 비 오는 날엔 창밖을 보며 비 냄새를 설명했다.

세상은 늘 중요한 일을 회사 밖으로 밀어내지만, 지안은 아이를 키우는 일이야말로 가장 직접 해야 하는 일이라고 믿었다.


태성은 그 확신이 부럽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했다.

부러운 이유는 지안이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이고, 답답한 이유는 자기가 그렇게 살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퇴직금의 일부를 따로 떼어 두었다.


조정일 뿐이다.

좋은 자산은 흔들릴 때 담아야 한다.

AI는 결국 더 커진다.


그는 아직 세상이 자기 계산대로 돌아올 거라고 믿고 있었다.

정확히는 믿고 싶었다.

불안한 사람은 늘 미래보다 반등을 먼저 기다린다.




5. 글로벌 지능 위기

전쟁은 처음엔 늘 뉴스였다.


먼 나라 지도 위에 붉은 점이 깜빡이고, 앵커가 국가 이름을 차례로 읽고, 전문가가 “확전 가능성”과 “제한적 충돌” 같은 말을 했다.

처음엔 다들 익숙하게 들었다.

중동 뉴스는 원래 늘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드론과 미사일 보복이 항만과 공항, 금융지구 근처까지 번졌고, 해상보험료가 급등했다.

유가가 오르고, 천연가스 가격이 뛰고, 물류비가 다시 들썩였다.

뉴스는 요즘 자주 같은 말을 반복했다.

미국이 예전처럼 모든 바다를 공짜로 지켜 주던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고.

그 말은 처음엔 추상적으로 들렸지만, 해상보험료와 운임이 오르자 곧바로 생활 물가로 번역되었다.

먼바다의 변화가 동네 장바구니로 들어오는 데는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기름값이 오르면 배가 비싸지고, 배가 비싸지면 물건값이 오른다.

물가가 다시 뛰면 금리는 쉽게 내려가지 못한다.

금리가 안 내려가면, 값싼 돈을 믿고 데이터센터와 전력 설비와 AI 인프라를 크게 벌려 놓은 기업들이 먼저 흔들린다.

주가가 떨어지고, 채용이 멈추고, 빚으로 버티던 사업이 꺾인다.

한국처럼 무역과 수출에 많이 기대 온 나라에서는 그 여파가 더 빨리 체감된다.

그리고 판교 같은 도시는 늘 그런 변화에 먼저 떨었다.


뉴스는 그걸 글로벌 지능 위기라고 불렀다.

Global Intelligence Crisis, GIC.


처음엔 거창하고 과장된 이름처럼 들렸다.

하지만 금방 익숙해졌다.


AI가 인간보다 똑똑해졌다는 뜻이 아니었다.

값싼 지능이 너무 많이 공급되면서, 인간이 하던 모니터 앞 일들의 가격이 무너지고, 그 기대 위에 쌓인 자산 가격과 부채 구조까지 한꺼번에 흔들리는 국면.

설명은 복잡했지만 감각은 단순했다.

월급은 불안해지고, 집값은 약해지고, 미래는 더 비싸졌다.


그날 밤 태성은 식탁에서 그 얘기를 최대한 쉽게 풀어 설명해 보려 했다.


“전쟁 때문에 기름값이 오르지. 그러면 물건값이 올라. 물건값이 오르면 금리를 못 내려. 금리를 못 내리면, 빚으로 커진 AI 쪽 기업들이 흔들려. 그게 주가로 오고, 회사들 채용이 멈추고, 판교 같은 데가 바로 식는 거야.”


지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다 연결돼 있다는 거네.”


“응. 예전엔 연결이 성장의 말이었는데, 지금은 전염의 말이 된 거지.”


며칠 뒤 정우가 저녁 산책 중에 말했다.


“회사에서 오늘 얘기 나왔어요. 신입 개발은 안 뽑는대요.”


“기획은?”


지안이 물었다.


정우는 웃었다.


“기획도 AI가 초안 쓰고, 경쟁사 분석하고, 문서까지 만들어요. 저는 이제 회의실에서 그 문장 읽어 주는 사람 같은 느낌이에요.”


다혜가 옆에서 농담처럼 말했다.


“그래도 목소리는 당신이 내잖아.”


정우는 웃었지만 바로 이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사람이 자기 쓸모를 농담으로 바꾸는 순간은 생각보다 슬프다.


그날 밤 태성은 뉴스를 보다 말고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 인터뷰 영상을 틀었다.

그는 여느 때처럼 확신에 차 있었다.

로보택시, 휴머노이드, 초거대 연산 인프라, 에너지, 그리고 놀라운 풍요.

Amazing abundance.

인간의 노동 비용과 이동 비용이 거의 제로로 수렴하고, AI와 로봇이 생산성을 폭발시켜 누구나 풍요를 누릴 수 있는 사회.


태성은 화면 속 그 확신이 부럽기도 하고 불쾌하기도 했다.

풍요는 늘 누군가의 발표자료 속에서 먼저 도착했다.


바로 그날, 태성의 계좌에서는 또 하나의 종목이 크게 미끄러졌다.

그는 화면을 끄지 못했다.

오히려 더 오래 봤다.

사람은 무너지는 숫자 앞에서 의외로 오래 앉아 있는 법이다.

어쩌면 그것도 일종의 애도인지 몰랐다.


지안이 조용히 물었다.


“얼마나 넣었어?”


태성은 모른 척했다.


“뭘?”


“퇴직금 중에.”


태성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안은 더 묻지 않았다.

하지만 편집자였던 사람 특유의 감각으로, 문장 사이의 빠진 부분을 이미 읽은 표정이었다.




6. 빛이 옅어진 판교

판교는 어느 날 갑자기 무너진 것이 아니었다.

먼저 불빛이 옅어졌다.


유리 사옥은 그대로 서 있었고, 카페 간판도 남아 있었고, 전기차 충전기도 빼곡했지만 건물 안의 사람 수가 줄었다.

사람이 줄자 점심 줄이 짧아졌고, 줄이 짧아지자 매출이 줄었고, 매출이 줄자 상가가 비었다.

도시는 언제나 사람보다 이유를 먼저 잃는다.


부동산 앱의 분위기도 달라졌다.


급매 나왔네요.

전세가가 안 받쳐줌.

사무실 다 빠지면 누가 들어오나.

판교도 예전 같지 않네.


태성은 어느 날 새벽, 같은 평형 급매가 생각보다 낮은 가격에 올라온 걸 보고 한동안 화면을 내려다봤다.

예전 같으면 “저건 가짜 매물일 거야”라고 넘겼을 텐데, 이번에는 스스로도 그 말을 믿지 못했다.

숫자는 언제나 무정하지만, 하락장에서는 특히 정직하다.


온라인 자문 일도 생각보다 더 빨리 시들었다.

대형 로펌도 기업자문은 빠르게 말라가고 있었고, 그나마 남는 건 송무 쪽이었다.

순수 자문은 AI가 너무 잘했다.

비싸고 느린 인간 자문을 고를 이유가 사라졌다.

소규모 개인사무실은 더 빨리 흔들렸다.

사람들은 이미 직접 AI에게 묻고, 필요한 서면은 자동화 서비스로 뽑고, 소송도 표준화된 건 대부분 저렴한 서비스로 진행했다.


태성은 버티기 위해 별의별 걸 해봤다.

계약 검토 단가를 낮췄고, 소규모 사업자 대상 패키지도 만들었고, 무료 상담도 열었다.

반응은 있었지만 일이 되지는 않았다.

문장이 넘쳐나는 시대에 매끈한 문장만으로는 차별화가 안 됐다.


불안은 사람을 다시 숫자로 돌려보낸다.


태성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자기가 따로 떼어 둔 돈으로 계속 조금씩 매수했다.

폭락은 기회라는 말을 그는 너무 오래 믿어 왔다.

좋은 자산은 흔들릴 때 사는 거라고, 결국 AI는 더 커질 거라고, 지금 파는 사람들이 나중에 후회할 거라고.


그건 냉정한 판단이라기보다 미련에 가까웠다.

하지만 미련은 언제나 판단의 목소리를 빌린다.


지안은 그 무렵 꽃집을 조금씩 자기 식으로 만들고 있었다.

큰 리본보다 얇은 종이 포장, 수입 장미보다 계절 들꽃과 국산 소재, 한 번에 큰돈 쓰는 선물보다 만 원 안팎의 작은 다발.

아이를 데리고 오는 엄마들, 혼자 사는 직장인, 반려견 산책하다 들어오는 사람, 병문안 가기 전 잠깐 멈추는 사람.

그들은 모두 비슷한 말을 했다.


“그냥 집에 두고 싶어서요.”

“오늘 너무 기분이 가라앉아서요.”

“큰 건 아니고, 작은 거요.”


지안은 그런 손님을 좋아했다.

특별한 날이 아니라 평범한 날에 꽃을 사는 사람들은 대개 삶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태성은 배달 일을 하루 뛰고 돌아왔다.

법률 자문 페이지보다 훨씬 빠르게 돈이 들어왔지만 금액은 적었다.

그리고 너무 많은 사람이 이미 그 일을 하고 있었다.

배달 대기 장소에는 전직이 넘쳤다.

전직 개발자, 전직 회계사, 전직 마케터, 전직 기자.

다들 헬멧을 쓰고 있었고, 예전 직함은 안전모 안에서 눌려 있었다.


예전에 판교에서 몇 번 마주친 적 있는 개발자 후배가 헬멧을 벗으며 말했다.


“형도 하세요?”


“어쩌다 보니.”


후배가 짧게 웃었다.


“저 예전엔 배달앱에서 주문을 누구한테 배정할지 정하는 코드를 짰잖아요. 지금은 그 코드가 저한테 일을 붙여 줘요. 되게 미래지향적이죠?”


그는 웃었지만 웃음이 오래가진 않았다.


집에 돌아온 태성은 말없이 씻고 나와 소파에 앉았다.

지안은 그 얼굴을 보고 바로 알았다.


“오늘도 별로였어?”


“응.”


“몇 건?”


“아홉 건.”


“많이 했네.”


태성은 그 말에 괜히 짜증이 났다.


“많이 하면 뭐 해. 남는 게 없는데.”


지안은 잠깐 멈췄다.


“나도 요즘 많이 팔아도 남는 거 크지 않아.”


“그거랑 같아?”


“왜 안 같아?”


태성은 입을 다물었다.

지안은 조용히 포장지를 접었다.


“당신이 힘든 건 알아. 그런데 자꾸 이걸 당신 혼자만의 실패처럼 만들지 마. 우리 지금 같은 집 안에서 같이 흔들리고 있어.”


그날 밤 지안이 재고 정리를 하다가 우연히 태성의 증권계좌 알림을 봤다.

추가 매수 체결.


알림은 짧았고, 충격은 길었다.


“이거 뭐야?”


태성이 돌아보았다.

지안 손에 든 화면을 보자 표정이 굳었다.


“설명할게.”


“얼마나 넣었어?”


태성은 바로 말하지 못했다.

그 침묵이 더 큰 대답이었다.


지안은 의자에 천천히 허리를 기대었다.

화내기 전에 먼저 지쳐 보였다.


“당신은 돈을 지키고 싶었던 게 아니야.”


“그럼?”


“예전의 당신을 지키고 싶었던 거지. 숫자가 계속 올라가던 시절의 당신.”


태성은 반박하고 싶었지만, 그 말은 너무 정확했다.

아니, 정확하다기보다 너무 아프게 예뻤다.

예쁜 문장이 늘 부드러운 건 아니다.

때로는 똑바로 꽂힌다.


“나는…”


그는 어렵게 말을 골랐다.


“다시 올라오면 숨통이 트일 줄 알았어.”


“누구 숨통?”


태성은 대답하지 못했다.


지안은 더 큰 소리로 화내지 않았다.

대신 아주 조용하게 말했다.


“나도 회사 그만둘 때 그랬어. 직함 없어지면 내가 없어지는 줄 알았어. 근데 내가 없어지는 게 아니라, 내가 어디에 기대고 있었는지가 드러나는 거더라.”


그날 둘은 한참 말이 없었다.

구름이는 그 사이를 왔다 갔다 하다가, 결국 둘 사이 바닥에 털썩 누웠다.


작고 따뜻한 동물이 가끔은 부부 상담의 가장 현실적인 버전이 된다.




7. 하린의 열

하린이 열이 난 건, 첫 바람이 유난히 차갑게 불던 저녁이었다.


아이들은 늘 타이밍을 기가 막히게 잡는다.

부모가 제일 지쳐 있고, 냉장고엔 약이 떨어졌고, 그날따라 체온계 배터리까지 방전될 때 아프기 시작한다.


하린은 원래 잘 웃는 아이였는데, 열이 오르면 입술이 먼저 조용해졌다.

그날도 그랬다.

품에 안았을 때 몸이 평소보다 뜨거웠고, 이마를 만져 보니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애매한 열이 아니었다.


지안은 바로 외투를 챙겼다.


“구소아과 가자.”


구소아과 원장은 구연정이었다.

중년의 여자 의사.

말이 센 편이었고, 어지간해선 달래는 말부터 하지 않았다.

보호자가 인터넷에서 읽어 온 이상한 지식을 늘어놓으면 표정부터 굳었다.

아이에게 설탕물 같은 약속을 하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괜찮아요”보다 “이건 지켜보세요”를 더 자주 말했고, “엄마가 너무 예민하세요” 같은 무책임한 말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 단호함 밑이 이상하리만치 따뜻했다.


아이 상태가 좋지 않으면 저녁이든 아침이든, 평일이든 주말이든 먼저 연락이 왔다.

“열은 떨어졌어요?”

“기침은 어때요?”

“숨소리 거칠면 바로 오세요.”


메시지는 짧았지만 이상하게 힘이 났다.

누군가 정말 기억하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간호사들도 친절했다.

구소아과는 전체적으로 목소리가 낮고 빠르지 않았다.

바쁘지만 쫓기게 만들지 않는 곳.

아이를 안고 있으면 세상이 다급해 보이는데, 그런 공간이 얼마나 큰 위안인지 부모들은 안다.


명절이면 지안은 작은 선물을 챙겨 갔다.

원장에게만 주는 게 아니었다.

간호사들 몫도 따로 챙겼다.

그럴 때마다 간호사들은 웃으며 말했다.


“어머니, 저희한텐 진짜 안 하셔도 돼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지안은 늘 비슷하게 답했다.


“원장님만 고마운 게 아니에요. 간호사 선생님들까지 다 같이 우리 아이 봐주셨잖아요. 저희한텐 다 구소아과예요.”


그날 진료실 문을 열자 구연정 원장은 하린을 보자마자 말했다.


“애가 축 처졌네. 언제부터 열났어요?”


지안이 시간을 말하고, 먹인 약을 설명했다.

구 원장은 하린 귀를 보고, 목을 보고, 가슴 소리를 들었다.

손이 빠르고 망설임이 없었다.


“폐 쪽은 아직 괜찮아요. 근데 밤에 더 오를 수 있어요. 해열 간격 지키고, 물 자주 먹이고. 새벽에 숨 가쁘거나 축 처지면 바로 오세요. 문자하세요.”


말은 짧고 단호했지만, 마지막 문장은 늘 남겨 두었다.

바로 오세요. 문자하세요.

그건 병원 바깥까지 책임을 조금 데려가는 문장이었다.


진료비를 계산하며 태성이 무심코 말했다.


“선생님은 그래도 괜찮으시네요.”


구연정이 고개를 들었다.


“뭐가요?”


“직업이요.”


구 원장은 잠깐 웃었다.

그 웃음은 대단한 낙관도 체념도 아니었다.


“글쎄요. 괜찮다기보다 아직 덜 사라진 거죠.”


그녀는 아주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의사는 지식만 다루는 직업이 아니거든요. 배도 눌러봐야 하고, 숨소리도 들어야 하고, 보호자 표정도 봐야 해요. 몸하고 마음이 같이 와요. 세상이 어려울수록 사람들은 누가 자기 아이 배를 눌러줬는지 기억하더라고요.”


태성은 그 말을 오래 곱씹었다.

문장을 잘 쓰는 사람은 많아졌지만, 아이 배를 눌러 주는 손은 여전히 부족했다.


집으로 돌아오고 몇 시간 뒤, 하린 열이 다시 올랐다.

해열제를 먹이고, 젖은 수건을 이마에 올리고, 체온을 재고, 안고 달래는 동안 시간이 이상하게 늘어났다.

아이가 아플 때 밤은 분 단위가 아니라 숨 단위로 간다.


새벽 한 시쯤, 지안 휴대폰이 울렸다.


하린이 열 어때요? 숨은 괜찮아요?


구연정 원장이었다.


지안은 잠깐 화면을 내려다보다가, “이래서 내가 구소아과를 못 떠나” 하고 중얼거렸다.

태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사람들은 AI가 다 안다고 말하지만, 누가 새벽 한 시에 먼저 문자를 보낼지는 아직 알고리즘이 정하지 못했다.


그날 밤 하린 열은 다행히 새벽 가까이 조금씩 떨어졌다.

서우는 방 문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물었다.


“하린 아파?”


“조금.”


“내가 물 가져다줄까?”


지안은 울 뻔했다.

아이들은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돌봄을 배운다.

오래 보고 있으면 저절로 닮는다.




8. 곰이가 짖는 밤

겨울은 생각보다 빠르게 깊어졌다.


판교의 겨울은 원래도 바람이 센 편이었지만, 그해는 유난히 건조하고 차가웠다.

해가 지면 유리 건물 사이로 부는 바람이 더 날카롭게 느껴졌다.

사람이 적어진 거리일수록 바람 소리가 더 컸다.

도시가 비어 가면 소음보다 마찰음이 먼저 남는다.


정우는 결국 회사를 나왔다.

정확히는 회사가 먼저 사람을 줄였고, 그 안에 정우가 있었다.

그는 겉으로는 덤덤했지만 곰이 산책을 나올 때 줄을 쥔 손에 힘이 더 들어가 있었다.

다혜는 애써 밝게 말했고, 더 밝게 말할수록 더 피곤해 보였다.


“요즘은 이력서도 AI가 대신 써 준다면서요.”


정우가 씁쓸하게 웃었다.


“문제는 그 이력서를 읽는 것도 AI라는 거죠.”


“그럼 사람은 뭐해?”


지안이 물었다.


정우는 곰이 귀를 만지다가 말했다.


“이제 사람은, 자기 자리가 조금씩 밀려나는 걸 받아들이는 일이나 해야 하나 보죠”


아무도 웃지 못했다.


그 무렵 아파트 관리 시스템이 여러 차례 업데이트됐다는 공지가 떴다.

에너지 효율 최적화, 스마트 난방 제어, 실시간 거주 패턴 분석.

다들 좋은 말이었다.

좋은 말은 대개 비용 절감을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태성은 그런 공지를 유심히 보지 않았다.

이미 자기 삶에는 더 직접적인 문제들이 많았다.

계좌는 더 얇아졌고, 부동산은 더 내려갔다.

그는 결국 남은 위험 자산 상당수를 손절해야 했다.

손해를 확정하는 버튼은 생각보다 가벼웠고, 눌러 놓고 나면 이상하게 손끝이 얼얼했다.


지안과의 사이는 겉으로는 조용했지만 완전히 풀리지 않았다.

둘 다 아이들 앞에서는 평소처럼 굴었고, 가게와 집안일도 나눠했다.

그러나 말의 온도가 예전 같지 않았다.

뜨거운 말 대신 안전한 말만 오갔다.

오랜 부부에게 그건 평화가 아니라 휴전이다.


그때 이상한 일이 시작됐다.


아파트 난방이 들쭉날쭉해졌다.

어떤 날은 지나치게 뜨겁다가, 어떤 날은 밤이 되면 바닥이 금방 식었다.

관리 앱에는 “정상 작동 중”이라고 떴다.

입주민 커뮤니티에도 비슷한 글이 몇 개 올라왔지만, 대개는 “집마다 차이 있겠죠” 정도로 지나갔다.

시스템이 정상이라고 말하면, 사람은 자기 감각을 먼저 의심하는 편이다.


그러던 어느 밤, 기온이 급격히 떨어졌다.


뉴스에서는 중동발 사이버 공격 가능성과 전력망 장애 대응 얘기가 나왔고, 금융권 몇 곳 결제 시스템이 흔들렸다는 속보도 떴다.

직접적인 피해가 그 아파트에 온 건 아니었지만, 연결된 사회에서는 작은 오류가 이상한 방향으로 번진다.


밤 열 시가 넘어서자 바닥이 확연히 차가워졌다.


지안이 양말을 한 겹 더 신기며 말했다.


“오늘은 진짜 이상한데?”


태성도 느꼈다.

거실 온도는 분명 내려가고 있는데, 앱 화면에는 적정 온도 유지 중이라고 뜨고 있었다.


“고장인가?”


“고장인데 정상이라고 뜨는 게 더 무섭지.”


하린은 다행히 큰 열은 없었지만 감기가 남아 있었다.

서우는 손을 비비며 말했다.


“엄마, 우리 집 왜 추워?”


태성은 관리 앱 고객센터에 접속했다.

챗봇이 먼저 떴다.


현재 시스템은 정상입니다.

실내 환경 차이는 개인 설정값에 따라 발생할 수 있습니다.


태성은 그 문장을 읽고 욕을 삼켰다.


그때 현관문 바깥에서 곰이가 크게 짖었다.

늘 장난스럽게 짖는 소리와 달랐다.

더 길고 불안한 소리였다.


문을 열어 보니 정우와 다혜가 복도에 서 있었다.

다혜는 패딩 위에 담요까지 둘렀다.


“혹시 댁도 추워요?”


“네. 지금 앱은 정상이라는데 집이 너무 차가워요.”


정우가 휴대폰 화면을 보여 줬다.

그들의 집도 마찬가지였다.

정상 작동.


“다른 집도 그런가 봐요.”


엘리베이터 앞 공용공간으로 하나둘 사람이 나왔다.

먼저 맞은편 집 문이 열렸고, 아이를 안은 여자가 얼굴을 내밀었다.

잠시 뒤 옆집 문도 열렸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아래층 노부부도 올라왔다.


다들 비슷한 표정이었다.

같은 추위를 함께 겪고 있다는 안도와, 그 추위가 정말 벌어진 일이라는 불안이 한 얼굴 안에 함께 떠 있었다.


아파트 사람들은 서로를 잘 몰랐다.

하지만 추위는 익명보다 먼저 번졌다.


그날 밤, 태성은 갑자기 자기가 할 일을 알아차렸다.




9. 시스템은 정상이라고 말했다

태성은 엘리베이터 앞 공용공간에 모인 사람들을 한번 둘러본 뒤 말했다.


“일단 집별로 온도랑 시간 기록해 주세요. 앱 화면 캡처도 같이요. 정상이라고 뜬다는 것까지.”


사람들이 잠깐 그를 보았다.

누구인지 모르는 얼굴도 많았다.

그는 스스로 소개했다.


“저 변호사입니다. 아니, 예전엔 회사 변호사였고… 아무튼 이런 건 문서로 남겨야 빨라요.”


정우가 바로 말했다.


“저 단체 채팅방 만들게요.”


다혜는 곧장 움직였다.


“온도계 있는 집들 확인해 볼게요.”


지안도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추운 집 아이들이나 어르신 먼저 저희 꽃집 쪽으로 오세요. 전기난로 있어요. 차 끓일 수 있고요.”


그 말이 떨어지자 사람들이 움직였다.

누군가는 핫팩을 가져왔고, 누군가는 보조배터리를 챙겼고, 누군가는 아이들 겉옷을 덧입혔다.

사람은 시스템이 멈추는 순간 아주 오래된 방식으로 돌아간다.

얼굴을 보고, 묻고, 건네고, 같이 모인다.


지안의 꽃집은 그 밤 임시 대피소처럼 바뀌었다.


꽃 냉장고를 비우고 난 뒤의 공간은 생각보다 넓었다.

전기난로를 켜고, 주전자에 물을 올리고, 접이식 의자를 펴 놓자 작은 대기실 같아졌다.

꽃집이라 그런지, 이상하게 공기가 완전히 차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몇 송이 남아 있던 꽃들이 은은한 냄새를 냈다.


서우는 담요를 들고 왔다.

하린은 아직 졸려서 지안 품에 안겨 있었다.

구름이는 가게 한쪽에서 사람들 발 사이를 맴돌며 분위기를 읽었고, 곰이는 문가에 앉아 커다란 몸으로 길을 막아 주듯 있었다.


태성은 노트북을 펴고 민원 문안을 쓰기 시작했다.

문장은 오래 만져 본 사람 손에서 나올 때 힘이 있다.

그는 최대한 쉽게, 그리고 단단하게 썼다.


아동과 노약자가 다수 거주하는 동에서 난방 저하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관리 시스템은 정상으로 표시되나, 실제 실내 온도는 정상 범위를 벗어났습니다.

자동 최적화 기준이 실제 거주 상황을 반영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으니 즉시 수동 점검 및 수동 전환을 요청합니다.


정우가 물었다.


“이게 먹힐까요?”


“시스템은 이상 없다고 버틸 거야. 그러니까 시스템 말고 사람 이름을 남겨야 해.”


“사람 이름?”


“누가 어떤 시간에 어떤 상태였는지. 아이가 몇 명인지, 노인이 몇 명인지. 책임은 결국 사람한테 돌아와야 움직여.”


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법률적이기도 했지만, 이상하게 생활적이기도 했다.


새벽 한 시가 넘어가자 하린 열이 다시 조금 올랐다.

지안 표정이 굳었다.


태성은 바로 구연정 원장에게 문자를 보냈다.

답은 생각보다 빨랐다.


숨소리부터 들어봐요. 쌕쌕거리면 바로 오세요. 애 너무 추운 데 두지 말고. 오면 진료실 열어 둘게요.


태성은 그 문장을 읽고 순간 목이 메었다.

세상은 점점 자동화되고 있었지만, 가장 급한 순간을 지켜 주는 건 여전히 이런 사람이었다.

저녁이고 아침이고 주말이고 상관없이 “오면 열어 둘게요”라고 말해 주는 사람.


정우가 차 키를 꺼냈다.


“형, 제가 태워다 드릴게요.”


다혜는 곧바로 말했다.


“서우는 저희가 볼게요.”


그건 크지 않은 말이었지만,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엄청난 규모의 호의였다.

아이가 아플 때 누군가 첫째를 봐주겠다는 말은 돈으로 환산이 안 된다.


지안은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괜찮아요?”


“괜찮아요. 곰이도 있고, 구름이도 있고.”


다혜가 웃으며 말했다.


구소아과에 도착하자 진료실 불이 켜져 있었다.

간호사 한 명도 남아 있었다.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지안은 눈가가 잠깐 젖었다.


구연정 원장은 하린 상태를 다시 보고, 숨소리를 듣고, 열을 재었다.


“다행히 큰 건 아니에요. 그런데 집이 너무 추우면 다시 나빠질 수 있어요. 오늘은 따뜻한 데 있게 하세요.”


태성은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선생님, 진짜 감사합니다.”


구 원장은 진료기록을 정리하면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감사는 애 안 아프고 나면 하세요. 지금은 정신 차리고.”


그리고 잠깐 뒤, 조금 더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돌아가서 엄마도 좀 쉬게 하시고요.”


그 말은 이상하게 태성의 가슴에 박혔다.

자기가 그동안 지안을 얼마나 함께 버텨 주지 못했는지, 아주 평범한 문장 하나가 더 잘 보여 줬다.


새벽 세 시가 넘어서 집으로 돌아오니 꽃집에는 여전히 몇몇 사람들이 남아 있었다.

정우는 핫팩 상자를 뜯고 있었고, 다혜는 서우와 함께 종이컵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구름이는 서우 발등에 붙어 졸고 있었고, 곰이는 문 옆에서 앉은 채 꾸벅꾸벅 졸다가도 누가 들어오면 꼬리를 흔들었다.


“하린 괜찮대요?”


“응. 괜찮아.”


그 말이 돌아오자 지안 얼굴이 조금 풀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태성이 구청 당직 담당자와 통화한 끝에 수동 점검 인력이 아파트로 출동한다는 답을 받았다.

관리 시스템이 실거주율이 떨어진 일부 라인을 ‘저활성 구역’으로 잘못 분류해 야간 난방 우선순위를 낮춘 것이 원인이었다.

효율을 높이겠다는 알고리즘이, 남아 있는 사람들의 체온은 계산하지 못한 셈이었다.


태성은 복도에 모인 사람들에게 그걸 쉽게 설명했다.


“집이 비어 있는 세대가 많아지니까, 시스템이 이 라인을 덜 중요한 구역으로 본 거예요. 에너지를 아끼려고. 근데 우리는 안 비어 있잖아요. 사람은 그대로 사는데.”


정우가 헛웃음을 쳤다.


“도시는 안 망했는데, 시스템이 먼저 우리가 없다고 판단한 거네요.”


그 말은 이상하게 정확했다.

글로벌 지능 위기 이후 판교 전체가 겪고 있는 일을, 그 한 동 난방 시스템이 먼저 흉내 내고 있었다.


아침 여섯 시가 되어서야 바닥이 조금씩 다시 따뜻해졌다.

사람들은 한숨을 쉬며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밤새 처음 말을 섞은 이웃들이 어색하게 “들어가세요” 하고 인사를 했다.

익명은 깨지고 나면 생각보다 쉽게 돌아오지 않는다.


태성은 마지막으로 꽃집 불을 끄기 전에 가게 안을 둘러봤다.

어질러진 담요, 비어 있는 종이컵, 다 먹지 못한 컵라면, 한쪽으로 밀린 화분들.

이상하게 망가진 풍경인데, 묘하게 살아 있는 풍경이었다.


지안이 그 옆에 서서 말했다.


“당신 오늘 잘했어.”


태성은 한동안 아무 말도 못 했다.

예전엔 잘했다는 말을 계약 성사나 연봉 협상 뒤에 들었다.

지금은 새벽에 아이 있는 집들 온도 기록을 모으고, 민원 문안을 쓰고, 사람들 모아 두고, 난방을 다시 켜게 한 뒤에 듣고 있었다.


그 말의 무게가 전보다 가벼워진 게 아니라, 오히려 더 정확해진 느낌이었다.




10. 직

그 겨울 이후, 태성은 화면 보는 시간이 줄었다.


부동산 앱을 완전히 안 보는 건 아니었다.

다만 예전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 열어 보지는 않았다.

시세는 여전히 중요했지만, 더 이상 자기 체온을 재는 도구로 쓰지는 않았다.

증권 앱 알림도 대부분 꺼 두었다.

남은 자산을 아주 안전한 쪽으로 옮기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숫자에서 조금 떨어져 앉을 수 있었다.


판교는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다른 곳이 되었다.


빈 사무실 몇 곳은 물류창고로 바뀌었고, 닫은 카페 자리에 공공 돌봄 공간이 들어섰다.

국가는 이상한 방식으로라도 인간 고용을 유지하려 했다.

AI가 만든 문서를 사람이 전달하고, AI가 정리한 민원을 사람이 읽어 주고, AI가 짠 동선을 사람이 마지막에 확인하는 자리들이 늘었다.

효율로만 설명하면 남지 않을 일들이었지만, 사회가 갑자기 그렇게 많은 사람을 바깥으로 내보낼 수는 없었다.


정우는 공공기관 계약직 공고를 보기 시작했고, 다혜는 전시 기획 대신 동네 문화센터 프로그램을 맡았다.

둘은 예전보다 돈을 덜 벌었지만, 이상하게 전보다 말을 더 많이 하게 됐다고 했다.

곰이는 여전히 컸고 아직도 아기 같았다.

구름이와 만나면 먼저 몸을 낮추는 습관도 그대로였다.


지안의 꽃집은 조금씩 자리 잡았다.


아주 큰돈을 벌지는 못했다.

하지만 월세를 내고, 재료비를 감당하고, 때로는 작은 흑자도 냈다.

무엇보다 손님들이 다시 왔다.

특별한 날이 아니라 평범한 월요일에도 들르는 사람들이 생겼다.


“지난번처럼 작은 걸로요.”

“오늘은 노란색으로.”

“회사에서 너무 기분이 안 좋아서요.”


그런 문장들이 쌓여 가게는 꽃집이면서 동시에 잠깐 숨 쉬는 곳이 됐다.


고연아 헤어도 비슷했다.


머리를 자르러 온 사람들은 거울 앞에 앉아 자연스럽게 아이들 안부를 물었고, 산책 나온 강아지들은 아직도 그 문 앞에서 한 번씩 걸음을 늦췄다. 지안은 가끔 연아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사람들은 머리만 자르러 오는 게 아니라, 누가 자기 얼굴을 제대로 한 번 봐 주는 날도 필요하다는 말.


생각해 보면 꽃을 사러 오는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 작은 가게들 덕분에, 동네의 안부도 끊기지 않고 이어지는 것인지 몰랐다.


지안은 어느 날 꽃집 한쪽 구석에 작은 책상을 놓았다.


“여기 앉아.”


“내가?”


“응. 상담 필요하다는 사람들 자꾸 당신 찾잖아.”


처음엔 그냥 접이식 테이블이었다.

그 위에 노트북 하나, 볼펜 몇 개, 간단한 서류철.

종이 한 장도 붙였다.


생활법률 상담 / 예약 우선


태성은 처음엔 조금 민망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사람들이 왔다.


대단한 기업 자문이 아니었다.

임대차 계약서, 자동화로 인한 퇴직 합의서, 보험금 청구, 학교 관련 분쟁, 돌봄 관련 서류, 프리랜서 계약, 온라인 사기 피해.

예전의 그는 이런 일을 “작은 일”이라고 불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직접 앉아 보니 작은 일은 없었다.

돈의 규모가 작을 뿐, 당사자의 삶에서는 늘 큰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일일수록 사람들은 문장 자체보다 누군가의 얼굴을 보며 묻고 싶어 했다.


“제가 이거 잘못한 건가요?”

“여기 사인해도 되는 거예요?”

“이 문장이 무슨 뜻이에요?”

“AI가 써 줬는데 너무 무서워서요.”


태성은 이제 그런 질문을 참을성 있게 들었다.

예전엔 더 빨리, 더 멀리, 더 큰 금액을 다루는 게 능력이라고 믿었다.

지금은 누군가의 말을 끝까지 듣고, 그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문장으로 다시 설명해 주는 게 더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았다.


서우는 가게에서 종종 종이와 리본을 만지며 놀았다.

어느 날 문득 물었다.


“아빠, 아빠 직업 뭐야?”


예전 같으면 태성은 바로 대답했을 것이다.

사내변호사.


지금은 조금 생각하게 됐다.

그러다 이렇게 말했다.


“요즘은 동네 사람들 상담해 주는 사람.”


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꽃집 아저씨네.”


지안이 옆에서 웃었다.


“꽃집 아저씨 맞지 뭐.”


하린은 뜻도 모르고 따라 웃었다.

구름이는 낮잠을 자다 말고 한쪽 눈만 떴다.

곰이는 유리문 바깥에서 꼬리를 흔들었다.


봄이 오자 지안은 가게 앞에 작은 문구를 하나 더 붙였다.


꽃은 특별한 날을 위해서만 있는 게 아니라, 평범한 날을 조금 더 살 만하게 해 주는 물건일 수도 있습니다.


그 문구를 읽고 멈추는 사람들이 있었다.

멈춘다는 건 아직 완전히 지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어느 저녁, 가게 문을 닫고 아이들을 재운 뒤 태성이 말했다.


“나 이제 좀 알 것 같아.”


“뭘?”


“왜 당신이 처음부터 일상 얘기를 했는지.”


지안은 물 한 컵을 따라 마시며 그를 보았다.

태성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나는 계속 무너진 판을 다시 세우려고 했어. 집값, 계좌, 직함. 근데 당신은 처음부터 판이 아니라 사람 쪽을 보고 있었더라.”


지안은 한참 뒤 말했다.


“나도 무서웠어. 다만 무서울 때 더 확실한 걸 붙잡은 거지.”


“뭐?”


“밥 먹는 시간. 아이 체온. 강아지 산책. 식탁 위 꽃을 새로 놓는 일. 누가 아프면 먼저 연락 오는 병원. 그런 건 아직 AI가 대신 못 하잖아.”


태성은 웃었다.


“못 한다기보다, 해도 이상하겠지.”


“그러네. 새벽 한 시에 원장이 먼저 문자 하는 병원을 AI가 흉내 내면 더 무서울 것 같아.”


둘은 오랜만에 같이 웃었다.

크게 웃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오래 버틴 사람들만 낼 수 있는 웃음이었다.


그날 밤, 태성은 오랫동안 한 가지 뜻으로만 알던 글자 하나를 다시 생각했다.


.


그동안은 직업의 직(職)이라고만 생각했다.

명함 위에 올라가는 것, 연봉과 붙어 있는 것, 사회가 사람을 분류할 때 쓰는 것.

그런데 이제는 다른 뜻도 떠올랐다.

엮을 직(織).

실과 실이 지나가 천이 되는 것처럼, 사람과 사람이 스쳐 지나가다 관계가 되는 것.


높은 연봉이 사람을 끝까지 지켜 주는 건 아니었다.

오른 집값도 아니고, 반짝이는 직함도 아니었다.

결국 사람을 살게 하는 건 함께 먹는 저녁, 별일 없냐고 묻는 안부, 아픈 아이 이마에 얹는 손, 평범한 날 식탁 위에 놓인 꽃 한 다발 같은 것들이었다.

일상의 소중함, 사람 사이를 오가는 안부,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는 체온.

그런 것들이 생각보다 오래 사람을 버티게 했다.


글로벌 지능 위기 이후 세상은 분명 더 차가워졌다.

소수의 자본과 기업은 더 많은 것을 가졌고, 많은 직업은 더 빨리 사라졌다.

사람들은 여전히 공무원 시험에 몰렸고, 누군가는 여전히 새로운 기술이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 줄 거라 믿었다.

맞는 말일 수도 있다.

다만 이번엔 사라지는 속도가 생겨나는 속도보다 훨씬 빨랐다.

그 차이를 견디는 건 결국 사람의 몫이었다.


태성은 이제 그 차이를 부정하지 않았다.

대신 거기서 무엇을 붙잡아야 하는지 조금은 알게 됐다.


봄비가 내리던 어느 날, 지안의 꽃집에는 유난히 손님이 많았다.

누군가는 퇴근길에, 누군가는 병문안 가기 전에, 누군가는 별일 없지만 그냥 집 안에 꽃이 없어서 들어왔다.

서우는 작은 꽃다발에 리본을 묶는 걸 도왔고, 하린은 카운터 옆에서 구름이 귀를 만지고 있었다.

정우와 다혜는 곰이를 데리고 들렀고, 구연정 원장은 퇴근길에 잠깐 들러 국화 몇 송이를 샀다.


“오늘은 왜 꽃 사세요?”


지안이 물었다.


구연정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냥. 우리도 사람인데.”


그 말에 모두가 웃었다.


태성은 그 웃음을 들으며 생각했다.

세상은 앞으로 더 많이 변할 것이다.

더 많은 화면이 생기고, 더 많은 일이 자동화되고, 더 많은 사람이 직업을 잃을 것이다.

어쩌면 어떤 미래는 정말로 놀라운 풍요에 가까워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풍요가 도착하기 전까지, 그리고 어쩌면 도착한 뒤에도, 인간에게 필요한 건 다른 이름일지 모른다.


누군가의 곁.

누군가의 손.

누군가의 저녁.

그리고 평범한 날에도 살 만하다고 느끼게 해 주는, 작고 분명한 온기.


무너지는 시대를 건너며 사람과 사람 사이에 남은 것을 붙드는 일.


그것이, 지금 태성의 직이었다.


일요일 연재
이전 02화단편소설: 율